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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회문화재답사
  송근영   2013-05-22   1328

제25회 문화재 답사


국립중앙박물관, 용주사

2013년 5월 25일(토) ~ 5월 26일(일)





자료정리 : 송 근 영


대한민국전통문화재조각회
조계종 2교구 본사 용 주 사




용주사는 신라 46대 문성왕 16년 (854)에 창건된 갈양사가 있었으나 병자호란때 소실되었으며, 정조가 이 곳에 절을 중창하면서 용주사로 명명되었다.
갈양사의 성격과 창건시기, 주체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용주사에 있는 갈양사 범종(국보 제120호)의 명문을 들 수 있다. 갈양사 범종은 상원사 동종,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 등과 더불어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되고있다.
이 명문은 반야 스님이 2만 5천근을 들여 범종을 조성하였음을 염거 스님이 기록한 것이다. 명문 내용에는 용주사가 갈양사의 후신인것을 알 수 있고, 신라 문성왕 16년 5월에 창건되었으며 범종도 이 때 만들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중에서는 당시의 창건주로 염거 스님을 들고 있다.

염거 스님은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제 2조이다. 스님은 설악산 억성사에 주석하며 선지를 탐구했는데, 개산조인 도의 스님의 법맥을 체징 스님에게 이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염거 스님이 창건하고 주석했던 갈양사는 창건 당시 선종사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후 고려 광종 28년 (970) 혜거 스님에 의해 갈양사는 왕실의 원찰이 된다. 이 때 광종은 스님의 제자 보욱 스님에게 불상과 탑, 전각과 누각 등을 수리하도록하여 중창을 하였으며 혜거 스님은 971년에 낙성을 기념하는 대규모 수륙대재를 지냈는데, 이 수륙대재가 우리나라 최초의 수륙대재로 알려져있다.

혜거 스님 이후 병자호란때 소실되어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갈양사는 조선 정조때에 이르러 비로소 용주사라는 사명으로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재등장한다.


용주사는 정조가 그의 부친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각종 유적지가 즐비해있어 가족과 효도의 의미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정조 13년 (1789)당시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뒷산)에 초라하게 묻혀있던 사도세자의 묘(영우원)를 현재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일대로 옮기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합장, 융릉을 조성했다. 당시 정조는 단순한 묘에 불과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왕릉에 준하는 규모로 확장하며 자신은 죄인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동시에 왕권강화의 발판으로 삼으려고했다. 융릉 바로 옆에는 정조와 왕비의 합장릉인 건릉이 위치하고 있다.
정조는 융릉을 이장한 후 5년이 지난 1794년 화성군 (현재의 수원시 포함)일대 민가를 집단 이전시키고 화성(수원성)을 조성, 2년만에 완공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실학자 유형원과 정약용의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5.52km의 이 성곽은 국내에서 가장 과학적이며 우아한 면모를 갖추고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가치와 예술성을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고있다. 정조는 당시 아버지의 묘와 가까운 이 곳을 도읍지로 지정하여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왕권강화를 도모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융릉을 화성으로 이장하면서 이들을 모시는 사찰로 설립한 것이 용주사이며 융 건릉과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있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용주사를 중창한 것은 가지산 보림사의 보경 사일 스님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정조는 보경 스님이 바친 「부모은중경」을 읽고 감명하여 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임명하고 부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을 창건토록 했다고 한다. 정조가 절을 짓고자 장소를 물색하자 신하들이 추천한 곳이 갈양사터다. 천하 제일의 복지라는 이유에서다. 이렇게 중창의 대역사를 시작한 용주사는 정조 14년(1790) 2월에 공사를 시작해 그 해 9월에 마무리한다.

정조는 용주사 중창 이후 틈나는대로 용주사와 융릉에 행차했는데 그 때의 장면이 그림으로 남아 지금도 생생히 볼 수 있다.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용주사에 전한다. 어느 여름날 융릉에 행차한 정조는 소나무 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를 잡아 한참을 쏘아보았다. “아무리 미물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임금의 아버님 능의 소나무 잎까지 갉아먹는단 말이냐. 비명에 가신것도 가슴이 아픈데, 너희들까지 아버님을 괴롭혀 드려서야 되겠느냐?”
마치 불효자를 꾸짓듯 독백을하던 정조는 말이 끝나자마자 송충이를 입에넣고 깨물어 버렸다. 정조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신하들이 앞다투어 융릉원 내에 있는 송충이를 잡아없앴고, 그 이후로는 융릉원에서 송충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한다.

이같이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용주사 완공 6년 만인 정조 20년 (1796)에 용주사 중창의 동기가 되었던 「부모은중경」을 목판으로 새겨 용주사에 봉안했다. 이 목판의 변상도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한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사원으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중창된 용주사는 당대 불교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중창과 동시에 봉은사와 봉선사, 개운사, 중흥사 등과 함께 5규정소의 하나로 지정되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규정소는 승려의 기강을 진작하고 승풍을 규찰하는 기구다. 용주사가 5규정소의 하나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정조의 지대한 관심과 국가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실제로 정조는 주지에게 높은 승직을 부여했고, 즉위 15년부터는 용주사 승군의 모든 장비를 보급하는 등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용주사는 일제시대에 들어 31본산의 하나로 지정돼 경기 남부의 49개 사암을 관장하는 대찰로 위세를 떨치게된다. 1920년에는 용주사 포교소 (지금의 수원포교당)을 설립해 포교사업의 모범을 보였고, 1955년에는 조계종 제2교구 본사가 되었다. 이 해에 관응 스님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했고, 1966년에는 희섭 스님이 동국역경원의 역장을 개설해 역경사업의 중흥에 도움을 주었고, 1969년에는 전강 스님이 중앙선원을 설립해 선풍을 일으켰다.

전강 영신 스님은 경허 성우 - 만공 월면 스님으로 이어지는 한국불교의 전통법맥을 이은 분이다. 스님은 1961년 인천 용화사에 법보선원을 개설해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으며, 스님의 법맥은 송담 스님으로 이어졌다.
용주사에는 부모은중경변상도 50여 목판과 대웅전 옆 잔디밭에는 10개항에 이르는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비가 우뚝 서 있다.

대웅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지휘로 그려진 걸작이고 정조가 심었다는 대웅전 앞 회양목은 수령이 200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 264호로 지정되어있다.
신라 염거스님이 창건한 용주사는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왕실의 원찰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으며, 정조의 깊은 효심과 관련된 「부모은중경판」을 소장하고있어, ‘효본찰’로도 이름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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