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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회문화재답사
  조각회   2013-01-19   1419


제24회 문화재 답사

경주박물관, 기림사, 감은사지, 문무대왕릉
2012년 6월 2일(토) ~ 6월 3일(일)




자료정리 : 송 근 영


대한민국전통문화재조각회

경주의 역사
경주는 신라 천년의 중심지로서 국보 23점, 보물 45점 등을 가진 그 자체가 하나의 노천 박물관이다.
고문헌에 의하면 청동기 시대에 삼한에는 78개의 소국들이 있었다고 하여, 이 소국들은 사로국, 백제국, 사벌국, 골화국, 압독국, 이서국, 소문국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소국들은 성읍국가로 여겨진다, 성읍국가(城邑國家)란 청동기 시대에 토성을 쌓고 지배층은 그 안에 살면서 성 밖의 농민들을 지배했던 국가형태를 말한다.
이중 경주평야에 위치했던 성읍국가 사로국이 신라로 발전했다.
고문헌을 보면 신라의 초기이름은 서라벌, 서벌, 사로, 사라 등으로 나타난다.
서벌(徐伐)은 ‘새벌’이라는 순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여겨지며, ‘새벌’은 글자 그대로 ‘새 들판’을 의미한다.
여기서 서울이라는 어휘가 나왔다.
신라 15대 기림왕 10년(307년) 한때 나라이름을 ‘신라’라고 한 적이 있으나, 국명을 ‘신라’로 확정지은 것은 22대 지중왕 4년(503년)이다.
경주(慶州)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 생겨났다.
고려는 서라벌의 이름을 경주로 고치면서 경상도 일대의 행정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다가 고려 성종때(987년)에 동경으로 고쳐졌고, 개경(개성), 서경(평양)과 더불어 고려삼경의 하나가 되었다가 고려 충렬왕 때 다시 계림부라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태종 8년(1408년) 경상도 감영이 경주에서 상주로 옮겨졌으며, 경주의 이름도 계림부에서 경주부로 다시 환원되었다.
조선 중종 14년(1519년) 경상도를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나누면서 경상우도의 감영은 상주에 그대로 두었고, 경상좌도의 감영은 경주에 설치하였다.
경상도(慶尙道)란 말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 가는 길’ 이란 뜻이다.
조선 선조 26년(1593년) 경상도 감영이 성주로 옮겨졌다가 선조 34년(1601년) 대구에 설치됨으로서 경상도 행정의 중심지는 경주에서 상주와 성주를 거쳐 대구로 넘어가게 되었다.
1910년 경주군 경주면이 되었고, 1931년 경주읍으로 승격했으며, 1955년 경주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3년 경주 일원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경주 국립공원은 시내지구, 선도산지구, 송화산지구, 남산지구, 소금강산지구, 토함산지구, 단석산지구, 그리고 문무왕 수중왕릉이 있는 대본지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주 국립공원은 자연경관을 기반으로 하는 다른 국립공원들과는 달리 신라의 찬란했던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다른 국립공원들이 자연 국립공원이라면 경주 국립공원은 문화 국립공원이다.

에밀레종
경주 박물관에 들어서면 우측으로 국보 29호인 에밀레종이 보인다. 봉덕사 종 이라고도 불리 우는 에밀레종은 공식 명칭이 성덕대왕신종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35대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을 위해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종이 완성된 것은 경덕왕의 아들인 혜공왕 6년(771년)이었다.
성덕대왕 신종은 봉덕사에 달았다가 수해로 인해 봉덕사가 폐사되자 영묘사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다시 남문 밖에 종각을 짓고 보관하다가 1915년 박물관으로 옮겼다. 그 뒤 경주박물관이 신축됨에 따라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성덕대왕신종은 높이가 3.33m, 아래 지름이 2.27m이고 무게가 18.9톤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서울의 보신각종, 오대산의 상원사 종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종이다, 그러나 소리가 맑고 깊어 멀리 전파되는 힘은 성덕대왕신종이 으뜸이다. 그리고 가장 크다.
서울의 보신각종은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만들었는데, 임진외란 때 소실되고 세조 4년(1469년)에 만든 원각사 종이 걸려 있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새로 주조한 범종이 걸려있다.
오대산의 상원사 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년)에 만든 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며 국보 36호이다.
성덕대왕신종의 표면에 약830자 쯤 되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성덕왕의 공덕을 종에 담아서 영원히 기리며, 종소리와 더불어 나라가 평화롭고 백성이 복을 누리기 바란다. 종을 만들기 시작한 경덕왕의 효성을 찬양한다. 종을 완성하지 못하고 경덕왕이 돌아가시자 혜공왕이 이어받아 완성했는데, 이는 혜공왕의 효성과 덕의 소치이다. 종소리와 함께 온 누리가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빈다.”
그리고 종의 밑에 구덩이를 움푹하게 파놓았는데 이것은 구천(九泉:죽은 뒤 넋이 돌아가는 곳)에 있는 중생들에게 종소리를 들려준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전설에 의하면 종을 만드는데 여러 번 실패한 끝에 한 여자가 무남독녀인 딸을 시주하여 가마 속의 쇳물에 넣어 비로소 종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종을 칠 때 어머니를 부르는 딸의 원망어린 소리가 난다고해서 에밀레종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에밀레종 전설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인주설화(人住說話)의 범주에 속한다.
인주설화 유형이란 사람을 재물로 하는 인신공양을 소재로 하는 설화들을 가르키며, 인주(人住)란 ‘성 쌓기, 다리 놓기 등을 할 때 사람을 물이나 흙속에 파묻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영혼이 들어갔으므로 견고하고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설화인 듯하다.
심청이가 임당수에 빠지고, 처녀가 지네에게 희생되는 내용의 설화들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에밀레종 설화와 가장 유사한 설화는 평안북도 강계에서 전승되는 서사무가인 ‘원구님청배’이다.
“안양사 라는 절에서 종을 만드는데 원산이 어머니가 ‘시주할 것은 원산이 밖에 없다’라고 했다. 그런데 종이 도무지 완성되지 않자 원산이를 쇠탕에 넣었다. 그 뒤 종을 치면 ‘에미헤르’라는 소리가 나는데 ‘어머니 혀 때문에’ 라는 뜻 이였다”
그러나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러하다
“경덕왕은 구리 12만근을 내놓아 아버지인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셨다.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이 770년 12월에 유사들에게 명하여 장인들을 모아서 기어이 완성시켜 봉덕사에 안치했다. 봉덕사는 성덕왕의 아들이요 경덕왕의 형이었던 효성왕이 738년 아버지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종을 성덕대왕신종이라 했다” (三國遺事 券三 塔像)

기림사
기림사는 493년경에 천축국의 안락국이라는 스님이 지어 임정사라 불렀으나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원효대사께서 크게 중창해 부처님이 계시던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 기림사라 명칭을 바꾸었다.
천축국의 광유 성인은 다생에 얽힌 인연을 불법으로 제도하려 안락국에게 해동국에 가서 수행 터를 잡을 것을 당부했다.
“안락국아, 너는 인연 있는 좋은 곳을 찾아 중생을 교화하여라. 동쪽으로 이백오십만리 떨어진 해동국에 가면 문수보살님이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계신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거든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국을 한 산을 찾아라. 동해 바다의 기운을 마시며 용이 사는 못이 있고 탑의 형상을 갖춘 남쪽 산에는 한 우물이 있으니 그 옥정의 물을 마시며 수행하라. 북쪽으로는 설산을 닮은 돌산이 있으리니 그 산 굴속에 부처님을 조성하면 수행과 교화가 잘 될 것이다.” 이러한 부촉을 받고 지형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바로 기림사 이다.
기림사는 조선 선조 11년(1578) 축선 스님이 중건한 이후 정조때 경주부윤김광묵에 의해 다시 중창되었다.
철종 13년(1862) 큰 불로 113칸의 건물이 소실된 것으로 전해져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하고 있으며, 고종 15년(1878) 혜훈 스님이 다시 중창했다.
일제 강점기에 31본산의 하나였던 기림사는 현재 비로자나삼존불(보물 제958호)이 모셔진 대적광전(보물 제833호)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경북유형문화재 제214호) 앞쪽에는 진남루(경북문화재자료 제251호)를 두고 있다.
진남루는 임진왜란 때 승군의 사령부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기림사는 고려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205호), 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호), 매월당 김시습 초상화 등 중요 유물이 보관되어 있으며, 근래에는 남북통일기원 삼천불전, 역사유물관등 당우가 신축되어 대가람을 이루고 있다.
기림사는 약수가 일품이다. 경내에는 다섯 곳의 샘이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물은 각기 다른 효능을 갖는다고 전해져 기림사 약수를 모종수라 칭하기도 한다.
북암에서는 차를 끓여 마시면 그 맛이 일품이라는 감로수가 나온다.
종무소 앞에는 까마귀가 쪼아 먹을 정도라 하는 오탁수가 있으며,
마시면 눈이 맑아진다는 명안수는 천왕문 앞에 있다.
또 마시면 마음이 화평해진다는 화정수는 후원 안에 있어 근래 새로 단장되었다.
그러나 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장군수는 현재 없다. 원래 응진전 앞에 있었던 이 우물은 조선시대 역모를 두려워해 조정에서 삼층석탑을 옮겨 막았다는 설과, 일제 때 장군이 날것을 두려워한 일본이 그랬다는 설이 전해진다.

대왕암과 감은사지
신라 30대 문무왕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성시킨 임금이다.
선왕인 태종무열왕을 도와 김유신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신라마저 영속적인 지배아래 두려했던 연합국 당을 이 땅에서 몰아내 태평성대의 기틀을 마련했던 대왕으로 추모된 임금이다.
하지만 동해에 인접한 수도 서라벌은 끊임없이 노략질해오는 왜구에 늘 시달려 왔다.
그래서 문무왕은 왜구의 침입로인 동해구에 진국사(지금의 감은사지)를 진호국가의 목적에서 건립하여 왜병을 물리치고자 했으며 신라의 동악인 토함산 정상에 탈해왕의 사당을 마련하고 천하무적지역사의 유골을 옮겨와 동악신으로 삼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죽어 동해구에 뿌려진다.
지의법사에게 늘 말했던 것처럼 ‘죽은 뒤에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화장을 하여 감은사 앞바다에 뿌리라 하였다.
문무왕의 유해는 유언대로 창고문 밖 뜰에서 화장된다. 그곳이 바로 경주 낭산 서쪽 능지탑이 자리한 일대이다.
그곳에서 화장된 유해는 동해구 바위섬에 묻힌다. 이곳을 대왕암이라 부르고 있다.
대왕암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를 뚫어 바닷물이 자연 배수되도록 했으며, 그 가운데 남북으로 크고 넓은 돌이 놓여있다.
파란 바닷물이 항상 깨끗하게 씻어주고 있는데 유골을 모신 석함의 돌 뚜껑이라고 짐작되고 있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동쪽으로 난 수로는 바닷물이 이 길을 따라 들고 나가도록 해 큰 파도가 쳐도 대왕암 내부는 잔잔하도록 설치되었다.
681년 7월 7일 왕위에 오른 31대 신문왕은 즉위 2년(682)에 문무왕이 짓다만 감은사를 완공한다.
‘감은’이라는 이름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왕의 은혜를 엎드려 감사한다(感恩俯伏 감은부복)’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신문왕은 감은사를 완성시키면서 동쪽을 향해 구멍을 뚫어 용혈을 만드는 등 세심한 정성을 기울였다.
이것은 1959년과 1979년에 실시된 감은사지 발굴에서 사실로 확인되었는데 법당의 기단을 이중으로 만들어 지하 전체가 공간으로 구성되어 이 공간을 타고 바닷물이 법당으로 들어오도록 설계되었다.
감은사를 완공한 이듬해 신문왕은 감은사지, 대왕암과 함께 3대 유적중 하나인 이견대에서 동해 해룡으로부터 부왕이 전하는 검은 옥대와 대나무를 전해 받는다.
신문왕은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경주, 서라벌) 천존고에 간직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았으며, 가물 때는 비가오고 비가 올 때면 개이며,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도 평온해졌다고 전해진다.
신문왕은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이름하고 국보로 삼았다.
신라 사람들은 삼국통일의 영주 문무대왕이 완전히 해룡이 되었다고 믿었고, 또 그 용은 동쪽의 해안을 괴롭히는 왜적을 막는 호국용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바다에서 만파식적을 얻은 것도 문무대왕이 용이 되어 삼한을 진호하고 있다는 신념을 신라 사회에 심어준 단편적인 내용이라 하겠다.
감은사는 바다와 대종천의 물길로 이어진 곳에 생명과 생산을 상징하는 여근 모양의 산봉우리 정면에 터를 잡았다.
‘동해구’라고 불려 왔던 감은사 앞바다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을 통하여 토함산을 넘으면 바로 신라의 왕경으로 통한다.
하기 때문에 왜구의 침입과 노략질이 항시 우려되던 곳이다. 그런고로 이곳 동해의 근심을 없애고 나아가 국민들에게 보다 확고한 신념을 확립하기 위하여 문무대왕은 진국사(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감은사에는 성덕대왕신종보다 더 큰 범종이 있었기 때문에 토함산 계류가 절 앞을 지나 동해에 이르는 내를 대종천이라 하였고, 범종은 임란 후 일인들이 일본으로 가져가다가 감은사 앞바다에서 침몰되었다고 한다.
동해구의 해안을 통하여 신라의 문물이 오고갔고, 드나드는 외국인들은 이곳 해중의 문무대왕릉에서 외경의 염을 금치 못했을 것이고, 또 감은사의 대탑과 대종에서 신라 문화에 대한 위압과 존숭(尊崇)을 느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종천의 물이 흘러드는 그 연원은 동악 토함산이었고 이 토함산은 천하무적 석탈해왕이 동악의 신으로 상주해 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감은사를 중심으로 몇몇 유적은 신라의 국방적 의미에서도 크게 부각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감은사 서쪽에 위치한 3층석탑에서 청동제의 아름다운 사리장엄구가 출현되어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사리함 지붕에 쌀알만한 풍경 다섯개 매달려 있는데 이 작은 풍경에 또 여러개의 금 알갱이 장식물이 붙어 있다.
어떻게 이런 미세한 금 가공이 가능했는가?
굵기 0.01cm의 금실 고리를 어떻게 몸체에 꿰었으며, 그 작은 탁설을 풍경에 달아 소리가 나게 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흑룡의 해에 용과 호국, 그리고 신라 문화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이곳으로 전통문화재조각회가 문화재 답사를 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리라.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문명에만 매달려 자연과 옛 문화를 파괴하는지 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 부박한 현대인들을 보고 1300년을 마주보고 지켜온 감은사 석탑 형제가 무어라 말할지 무서워진다.
  25회문화재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