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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회 문화재답사
  조각회   2010-07-06   2466
강원도 영월에는 이름만 들어도 더위가 가실 듯한 동네가 있다. 물로 둘러싸인 수주면 무릉리와 도원리. 산 깊은 골짜기마다 맑은 계곡물이 흘러 온 고을이 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물줄기는 사자산에서 시작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자산은 수석이 30리…도화동과 무릉동도 계곡 경치가 훌륭하다.…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 만한 지역"이라고 꼽았다. 이렇게 경치 좋고 산기운이 넘치는 사자산 연화봉 아래 불교계의 성지 법흥사 적멸보궁이 자리하고 있다.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남쪽 기슭에 있는 법흥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4교구 월정사의 말사로서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께서 선덕여왕 12년(643)에 창건했다는 유서깊은 고찰이다.

본래 사자산 법흥사의 지명 유래는 산세가 불교의 상징 동물인 사자형상을 닮았고 지혈이 한 곳에 모이는 길지이며, 뒤의 산봉우리가 불교의 상징 꽃인 연꽃 같이 생긴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장율사는 당나라 유학 중 청량산에서 현신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 바리 한 벌, 진신사리 100과를 모셔왔다고 한다. 643년 귀국한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에 진신사리를 나눠 봉안했는데 이들이 한국의 5대 적멸보궁이다.

자장율사께서 사자산 연화봉에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나라의 흥륭과 백성의 편안함을 주기 위해 사명을 흥녕사로 이름하여 창건했다. '적멸보궁'이란 '온갖 번뇌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이란 뜻이다. 흥녕사는 847년에 신라 말의 선승인 도윤칠감국사가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하여 이곳 사자산 법흥사에 선문을 개창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방대했던 사자산문이다. 이어 도윤칠감국사의 제자 징효절중 선사에 이르러서 사자산문은 더욱 번창하여 전국의 선승들이 이곳 사자산 법흥사를 거의 거쳐갔다. 특히 도윤칠감국사와 징효절중선사는 당시 국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채 이곳 사자산문을 나가지 않음으로써, 전 불교계와 조정의 존경을 받은 고승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이 지역은 궁예가 영월, 평창, 강릉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여서 흥녕사도 병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이후 1천년 가까이 법등이 꺼졌다가 1백 10년 전 쯤 중창하면서 사명을 법흥사로 바꿨다.

법흥사 입구는 1㎞ 밖부터 솔 향이 가득하다. 들어갈수록 울창해지는 송림은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어 위용을 자랑하며 은은한 솔향기로 세속에 찌든 마음을 말끔히 씻어준다. 특히 주차장에서 적멸보궁으로 가는 솔 숲 오르막 길은 숲이 도탑고 길은 고즈넉해 마음이 자연으로 녹아드는 듯 그윽하다. 사찰 앞에 줄줄이 이어진 아기자기한 아홉 개의 봉우리(구봉대) 역시 일품이다. 이 숲에는 천연기념물 제 242호 까막 딱따구리가 살고 있다. 적멸보궁은 사자산 품에 안겨, 우백호로 사암봉과 구봉대산을 두르고, 백덕산이 좌청룡이 된다. 정남향으로 구봉대산이 그대로 흘러 남산 노릇까지 한다. 벌의 허리처럼 모든 지혈이 한곳에 모이는 길지란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우박이 오지 않고, 소나무가 휘지 않으며, 절터에서 구봉대산 쪽으로 자주 빛이 발산되고, 보궁 위의 산에 오르면 반드시 해를 입는다는 네 가지 불가사의가 전한다. 적멸보궁은 높고 긴 석축을 쌓아 집터를 마련하고 그 중앙에 지은 목조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적멸보궁 기와의 입막새에는 법(法)자가 쓰여져 있고 소화 8년 11월 준공이라는 글씨가 양각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1934년에 법흥사를 새로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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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내에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훈수'라는 제목의 현판이 있다. '불기 이천구백육십육년 기묘 시월 일일'이라 쓰여 있는 것을 보니 현재 세계적으로 통일하여 사용하고있는 불기로는 2466년에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적멸보궁 이 전에 있었던 건물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29호로 지정되었었다고 한다.
보수 중인 적멸보궁의 주련에는 자장율사의 불탑게가 새겨져 걸려 있는데 보수하기 위해 설치된 시설물 때문에 조금씩 가려져 있다.

'만대윤왕삼계주(萬代輪王三界主)' 만대의 왕이며 삼계의 주인이여
'쌍림시멸기천추(雙林示滅幾千秋)' 사라쌍수 열반 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진신사리금유재(眞身舍利今猶在)' 부처님 진신사리 지금 여기 존재하니
'보사군생예불휴(普使群生禮不休)' 뭇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를 쉬게 하지 않으리

적멸보궁 뒤에는 자장스님이 불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이라 전해지는 토굴과 사리탑이 있다. 적멸보궁 뒤 축대 위에 있는 석조 사리탑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됐다고 전해지나 학자들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도 하다. 토굴의 외부는 뒤편의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그 흙으로 석실을 덮었는데 남향한 입구 쪽 정면만 높고 뒤편은 경사 때문에 약간 봉긋한 모양의 원형으로 마치 무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봉토의 높이는 1.48m이며 외곽의 지름은 4-72-5.77m이다.

토굴 안의 평면은 입구부터 약간씩 넓어지다가 중심부에서 서쪽 한쪽만이 확장되고 모서리를 깎아 원형에 가깝도록 했다. 주위의 벽과 천정은 자연석으로 축조했는데 평평한 면을 가려서 쌓아 마치 치석한 석재로 보인다. 벽은 10단을 쌓아 올리고 천정석을 놓았는데 6단까지는 거의 수직이고 7단부터는 모서리를 없애기 위해 장대한 미석을 얹어 8, 9, 10단에서 각을 깎아 거의 원형을 이루는 두팔천정(斗八天井) 형식이다. 내부의 높이는 키 작은 사람이 겨우 설 수 있을 정도인 160㎝, 넓이는 190㎝에 불과해 앞쪽에 조그마한 숨구멍만 남겨둔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자장율사 이후 다른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석관을 안치하여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하고 경첩을 간직하던 곳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토굴 옆에는 자장율사께서 당나라에서 불사리를 모셔올 때 사리를 넣고 사자 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이 남아있다. 몸체의 개석이 모두 파손되어 있으나 각부의 부서진 조각이 잔존함으로서 완전한 형태를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석함은 한 개의 장방형 돌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서 또한 징효대사가 쓰던 경함이라는 설도 있다.


현재 법흥사의 유적으로는 옛 흥녕사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3개의 석탑과 1개의 수호석불좌상,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 적멸보궁, 사리탑(강원도 유형문화재 73호),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보물 612호), 징효대사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72호), 흥녕선원지(강원도 지정 기념물 6호)가 있고 종이가 없던 시절 인도 영라수 잎에 범어로 기록한 패엽경이 있다.

이렇게 웅장했던 사자산 법흥사도 역사의 흐름, 세태의 부침에 따라 중창을 거듭하게 되었다. 643년 신라시대 때 창건된 이래, 1163년 고려 의종 때 중창하였으며, 그 후에도 1730년 조선 영조 6년 때 중창하고, 1778년 정조 2년, 1845년 헌종 11년, 1939년 임시정부 당시, 그리고 현 주지이신 도완스님의 원력으로 이번까지 무려 일곱 차례의 중창을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그 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강원도땅 정선은 외지 사람들이 마음처럼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곳이다. 백두대간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정선땅은 '어지러운 봉우리들이 높고 깎아지른 듯하여 겹으로 된 성과 같다'는 말처럼 태백산, 중봉산, 문래산, 가리왕산 등 1000m가 넘는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사북?고한 탄광촌으로도 유명했던 이곳 정선땅 태백산 기슭에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맨 마지막에 건립했다는 정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214번지이다.

정암사는 자장 스님이 만년에 머물면서 수행한 곳이자 열반처이다. 스님은 삼국불교 중 가장 늦게 출발한 신라불교를 사상적으로나 국가적?대중적으로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한 분이다. 스님의 속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선종랑이다. 스님의 아버지인 무림은 늦게까지 아들이 없자 관음상을 조성해 사월 초파일날 스님을 낳았다. 스님의 속명이 선종랑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부모를 여읜 후 홀로 깊은 산에 들어가 백골관을 닦으며 정진했다. 《삼국유사》〈자장정률〉조에 따르면 스님은 재상자리를 주고자 세상으로 나오라는 왕명에도 '하루 동안 계율을 지키다 죽더라도 백년동안 계율을 어기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며 듣지 않았을 정도로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선덕여왕 5년(636) 중국에 유학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친착 금란가사와 진신사리를 전해받아 귀국한다. 분황사와 황룡사에 머물면서 《대승론》을 강의하고 보살계본을 설하는 등 대중 교화에 힘쓰던 스님은 선덕여왕의 명으로 대국통이 된 후 교단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다. 모든 스님들에게 매년 봄과 겨울 두 차례 시험을 치렀고 한달에 두 번씩 계를 설했다. 또 순사를 보내 지방의 사찰을 일일이 살피고 승려들의 과실을 징계하도록 했으며, 불경과 불상을 정비했다. 그 결과 열 집 중 여덟아홉 집에서 계를 받았으며, 출가하려는 사람이 해마다 달마다 불어났다고 한다. 스님은 또,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우도록 건의해 불교사상을 통한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꾀했고, 당의 연호나 복식을 도입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하도록 하기도 했다. 스님의 이런 노력으로 신라불교는 국가사상의 주축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사상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신라사회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정암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자장정률〉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자장 스님이 만년에 경주를 떠나 강릉부에 수다사를 세우고 살 때였다. 어느날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그대를 대송정에서 보겠소"라고 말했다. 스님이 놀라 다음날 일찍 대송정에 이르니 문수보살이 현신했다. 스님이 불법의 요체를 물으니 문수보살은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세"라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스님이 태백산에 이르러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석남원(지금의 정암사)을 세우고 문수보살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 문수보살을 다시 만나기 위해 보살이 일러준 갈반지에 정암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자장 스님이 이곳에 언제 수마노탑을 세워 진신사리를 봉안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정암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스님이 진신사리를 모실 탑을 세우려고 할 때마다 번번히 탑이 무너졌다. 이에 스님이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어나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사찰 자리에 멈추었다고 한다. 그곳에 탑을 세우고 절을 '갈래사'라 이름하고 지명 또한 '갈래'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정암사 인근에는 상갈래, 중갈래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정암사사적》에 따르면 이 수마노탑은 서해 용왕이 자장 스님이 불탑을 세울 때 사용하도록 옮겨둔 마노석으로 건립됐다. 스님은 수마노탑을 세울 때 금탑과 은탑을 함께 세웠는데, 사람들의 탐심을 우려하여 불심이 없는 중생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도록 비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돌로 쌓은 수마노탑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건립 이후의 수마노탑에 대해서는 18세기까지 남아있지 않다. 1713년 천밀 스님이 중수했으나 이듬해 벼락으로 무너져 1719년 보수했다가 1770년부터 3년간 취암 스님이 다시 중수했다. 이때 중수된 탑은 '본관의 높이가 칠층, 놋쇠 상륜부가 오층, 풍경이 서른둘이었다'고 한다.

수마노 탑은 이후 1874년 벽암?남호 스님에 의해 다시 중수되고, 1972년에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전면 해체 복원됐다. 이때 탑의 각 부에서 다섯 매의 탑지와 사리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이들 유물은 탑안에 재봉안됐다.

정암사 경내에 있는 적멸보궁은 이 수마노탑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전각이다. 선덕여왕이 하사한 자장 스님의 친착 금란가사는 1975년 11월까지 이곳에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문수보살을 기다리며 말년을 보낸 자장 스님의 최후에 관한 일이 〈자장정률〉조에 기록돼 있다. 내용은 어느날 죽은 강아지를 담은 삼태기를 맨 늙은이로 변신한 문수보살이 찾아왔다. 그러나 스님은 그 노인을 미친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만나지 않았다. 문수보살은 "아상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라며 사라졌는데, 이 말을 들은 스님이 황급히 쫓아 고개에 올랐으나 이미 사라진 뒤였다. 스님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입적했는데 스님의 법구를 화장해 굴 속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정암사사적》에는 이 사실에 덧붙여 스님이 유골을 암혈에 갈무리하여 훗날 찾아와 만져보는 이들이 함께 정토에 왕생케 하라고 유언했다는 사실과 스님의 유골을 조전 남쪽 바위에 안치했는데 때때로 빛을 발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스님의 유골이 안치돼 있던 조전 남쪽 바위는 정암사 뒤쪽의 산봉우리인 '뾰족봉'에 있다. 이곳 정상부근에 석실이 있는데 이곳이 스님의 유골을 안치한 곳이라고 전한다. 이곳에는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수마노탑에 쓰인 석재와 석질이 같은 가로 세로 50㎝ 가량의 석함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정암사 인근의 나이든 주민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60여년 전까지만 해도 스님들이 정기적으로 석실에서 다례법회를 했다거나 20년 전만 해도 그곳에 청자편이 많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정암사는 이처럼 자장 스님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다. 비록 자장 스님의 유골을 모신 석함도 사라지고 그 발자취마저 가물해졌지만 스님이 꽂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고목만은 스님이 다시 와 새로 잎을 피워낼 그 날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수려한 절경으로 인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청령포에 얽힌 단종의 비화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국가지정 명승 5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륙봉이라 불리는 마치 톱날과 흡사한 6개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단종 유배 시에 세운 금표비와 영조 때 세운 단묘유지비가 서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또한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이 있다.


2000년 4월 5일 단종문화제와 때를 맞춰 건립된 단종어가는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나름대로 재연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어가는 어가 또는 적소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과 주거형태, 어가의 위치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한동안 논란을 겪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재현되었다.

어가 담장 안에는 유지비각이 위치해 있다. 이 비는 총 높이 162㎝로 밑으로 1단의 화강석 비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전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 새겨져 있고 측면에는 '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체경서 영원영수석(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 …)'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전면 측면 각 1간의 비각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각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금표비가 있다. 금표비에는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다.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 안에서 금표나 금송에 대한 채취 금지항목으로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다.

청령포 뒷산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관음송은 청령포 수림지(단종의 유배처 주위의,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거송들이 들어 찬 울창한 송림)에 위치하고 있는 소나무로 단종 유배 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으며 1988년 천연기념물 제 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종 유지비각 서편에 서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가슴높이의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 서로 비스듬히 자랐다.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3.3m, 남북 20m로 가지를 펼치고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 시의 수령을 80년으로 하여 계산된 것이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에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곳으로 주변에는 우거진 소나무의 숲이 있고, 관음송은 그 소나무 숲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24회문화재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