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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회 문화재답사
  조각회   2009-07-02   2494








영축산 통도사

경남 양산군 하북면 영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통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15교구 본사로서 삼보 사찰 중 으뜸인 불보사찰이다. 통도사는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와 함께 삼보 사찰로 불리우고 있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 송광사는 수많은 대승을 배출해 승보,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어 불보사찰이다.

통도사는 신라 27대 왕인 선덕여왕 15년 646년에 자장스님이 창건하여 산 이름을 영축산, 절 이름을 통도사라 했다.
원래 영축산은 축서산이었는데,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비슷했기 때문에 이름을 바꾼 것이다. 사명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첫째 전국의 승려 모두 이 곳의 금강계단에서 득도한다는 뜻이며, 둘째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고, 셋째 산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장스님이 당나라로부터 643년 귀국할 때 모시고 온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여함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로 부각되었고, 금강계단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받아 득도시켜 신라불교의 계율 근본도량으로 만들었다.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 즉 국장생석표를 둘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통도사 가는 길은 매우 운치가 있다. 냇물이 흐르는 길 한 켠으로 노송들이 늘어서 있어 걸어가는 기분이 매우 상쾌하다. 바람따라 물길따라 걷다 보면 어느덧 세속의 찌든 때는 어느정도 씻기워 진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하마비와 석가모니불을 둘러싼 2천 5백 대비구같이 영축산을 등지고 시립해 있는 부도전을 보니 통도사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된다. 영축산 통도사라고 쓰여진 일주문 기둥에는 국지대찰, 불지종가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일주문과 금강문, 불이문을 차례로 지나면 좌우로 품위있는 모습의 건물과 탑이 줄을 잇는다. 적멸보궁은 정면에 서 있다. 건물 사방으로 적멸보궁, 대웅전, 대방광전, 금강계단이라는 현판을 걸은 것이 특징이며 금강계단 글씨와 일주문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라 한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불상은 모셔지지 않고 빈 불단 뒤로 창이 넓게 나 있어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보인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스님은 한국불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자장스님은 신라진평왕 12년(590)에 진골출신으로 소판 벼슬을 지낸 김무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가 천수관음상을 조성하고 자식 낳기를 지성으로 발원하여 그를 낳았는데 4월 8일 불탄일에 낳았으므로 선종랑이라 불렀다. 부모를 여읜 뒤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원녕사라는 절을 짓고 백골관을 혼자 수행했다. 그 때 조정에서 대신 한 사람을 물색하였는데 자장이 적임자로 지목되어 소환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이에 선덕여왕이 '응하지 않으면 참하겠다'고 하였으나 자장은 끝내 굽히지 않고 그 유명한 "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니고 죽을지언정, 백년을 파계하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이라고 하며 응하지 않았다. 그의 장한 수행에 감복한 왕은 출가를 허락하였다. 이후 더욱 정진하여 꿈에 천인에게서 계를 받고 산을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계를 설하였다. 더욱 깊은 불교 공부를 하기 위해 선덕여왕 5년(636)에 제자 실승 등 십여 인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오대산(청량산)에서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하던 중 꿈에 노스님이 나타나 범어계송을 전해 받는다. 그리고 다음날 문수보살이 화현한 스님으로부터 범어계송의 해설을 듣게 된다.

발라구자나 了知一切法 (일체 법을 알고자 한다면)
부리치가나 自性無所有 (자성은 있는 바 없다)
낭가휴사남 如是解法性 (이와 같이 법성을 깨달으면)
치리노사나 卽見盧舍那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불법을 구하고자 하면 이 계송 한 수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하며 부처님의 비라금점가사 한 벌, 백옥 바리때 한 벌, 주패금엽경 5첩, 부처님의 진신사리 100과 등을 전해 주며 "이는 모두 석가모니불의 신물이니 삼가 잘 보호하도록 하라" 라는 말을 듣고 또 태화지의 용신에게서는 본국으로 돌아가면 황룡사에다 9층탑을 세우라는 말을 들었다.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자장스님이 태화지의 못둑을 지나는데 홀연히 신령한 사람이 나와 묻기를 "어찌하여 이 곳까지 왔는가?"하였다. 자장이 대답하여 "불교를 채득하려 왔소이다"하니 신령한 사람이 절을 하면서 다시 묻기를 "너희 나라에서 살기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한 즉 자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 남으로 왜국과 연접하였으며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고 이웃나라 적들이 횡행하여 이것이 바로 백성들의 고통이오"하였다. 신령한 사람이 일러서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로써 임금을 삼았기 때문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나라들이 모해코자 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자장이 묻기를 "고국으로 돌아가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소?"하니 "황룡사의 호법룡[불교를 옹호하는 용]은 바로 나의 맏아들이다. 범왕의 명령을 받고 가서 이 절을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 절 가운데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들이 항복을 하고 9한이 와서 조공할 것이며 왕위가 길이 평안하리라. 탑을 세운 후에는 팔관회를 배설하고 죄인들을 석방하면 외국의 적들이 해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는 경기지방의 남쪽 해안에 자그마한 절 한 채를 지어 나의 복을 빌면 나 역시 이 은덕을 갚을 것이다"하고 말을 마치자 옥을 바치고는 홀연히 간 곳이 없어졌다.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과 불상과 가사와 폐백들을 가지고 귀국하여 국왕에게 탑 세울 사연을 아뢰니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백제로부터 재인바치를 청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외다"하였다. 이리하여 보물과 폐백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재인바치를 초청하였다. 아비지라는 재인바치가 명령을 받고 와 공사를 경영하는데 이간 용춘이 일을 주관하여 졸개 재인바치 2백명을 인솔하였다. 처음에 절 기둥을 세우는 날 그 재인바치의 꿈에 백제가 멸망하는 꼴을 보고 그는 마음이 설레어 공사를 정지하였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면서 컴컴한 속에서 웬 늙은 중과 장사 한 명이 금전문으로부터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 중과 장사는 함께 간 곳이 없어졌다. 재인바치는 이 때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절 기둥 기록에는 「쇠 바탕 이상의 높이가 42자요, 그 이하가 183자라」 하였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얻은 사리 백 낱을 이 기둥 속과 아울러 통도사 불단과 대화사 탑에 갈라 모셨으니 이로써 그는 용의 청촉에 이바지하였다. 탑을 세운 후에 천지가 비로소 태평하고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어찌 이것이 탑의 영험이 아니랴! 또 우리나라의 이름난 학자 안홍이 지은 「동도성립기」에는 9층탑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 것을 소개하면, 신라 제27대는 여왕으로 임금을 삼으매 비록 원칙은 세웠다고 할 수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9한이 침노를 하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의 침범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니 제1층은 일본(日本), 제2층은 중국(中國),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穢貊)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통도사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계단은 본래 큰 연못이었다고 전한다. 대웅전 서쪽에 있는 구룡지는 그 사실을 전하는 유적이다. 자장 스님은 축서산의 신지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라는 문수보살의 부촉을 받는다. 스님은 이 곳에 와 신지에 사는 아홉 마리 용을 교화해 연못을 메꾸었는데, 그중 한 마리 용이 남아 이곳을 지키겠다고 하므로 연못의 일부분을 남겨두고 그곳에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설을 간직한 구룡지는 깊이가 한 길도 채 안되는 타원형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수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덕여왕 12년(643)에 거국적인 환영 속에 귀국한 자장스님은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대승론을 강설했고 황룡사에서는 <보살계본>을 7일 간 설법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불교의 정리와 교단의 통제를 위하여 자장스님을 대국통으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그는 승니의 모든 규칙과 교단의 제반 사항을 정비하여 승니로 하여금 수학에 힘쓰고 계율을 잘 지키게 하였다. 그 결과 교단은 질서가 확립되어 일대의 호법이 대성을 보게 되었으며, 당시 국민의 대부분이 수계하고 불교를 믿었다고 한다.
자장스님의 업적을 요약하면 첫째,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교화한 일, 둘째 당나라에서 귀국해 호국호법의 불사를 흥기시킨 일, 셋째 대국통이 되어 승니의 기강을 정립하고 교단을 정비한 일, 넷째 조정의 문물 제도를 혁신시킨 일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교학과 중심사상은 율학과 화엄사상이라 할 수 있다.
통도사의 역사는 곧 금강계단의 역사라고도할 수 있다. 그것은 통도사의 창건과 경영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불보사찰 또는 계율도량으로서의 특성을 결정짓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도사와 관련된 기록들은 전반적인 역사와 변천을 다룬 여느 고찰의 그것과는 달리 금강계단의 변천과 역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려 고종 22년(1235)에는 상장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이 고종의 명을 받아 참례하고 금이 간 유리통 하나를 수정통과 교환해 사리를 봉안했으며, 1264년에는 원나라의 사신이 찾아와 예를 올렸다고 한다. 이렇듯 신앙의 대상으로 존숭을 받아오던 금강계단은 고려말 국력이 약해지면서 왜구의 사리침탈 기도로 수난을 당한다. 당시 통도사의 주지였던 월송스님은 우왕 3년(1377)에 왜구가 침입하자 사리를 모시고 피난했었고, 2년 후인 1379년에는 사리를 모시고 개성으로 피난하기도 한다. 이때 사리는 왕실 원찰인 개성 송림사에 봉안되었는데, 사리가 무수히 분신하는 이적을 보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왜구의 사리 탈취기도는 이어져 임진왜란 때는 사리를 약탈 당했다가 포로로 잡혀갔던 동래사람 옥백거사가 되찾아 선조 36년(1603)에 봉안했다.

효종 3년(1652)에는 정인 스님 등이, 숙종 31년(1705)에는 계파 성능 스님의 중수로 계단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후로도 영조 19년(1734)과 순조 23년(1823)에도 계단의 보수가 이루어졌다.
근?현대 스님으로 통도사에 주석했던 대표적인 스님으로는 경봉 스님, 구하 스님, 월하 스님 등을 꼽을 수 있다. 189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경봉 스님은 출가해 수행하며 경전을 읽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푼어치의 이익도 없다"라는 구절에 큰 의심을 품고 수선 정진해,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1930년 2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으로 취임한 뒤 통도사 주지,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이사장 등을 역임한 스님은 1953년 통도사 극락호국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납자들을 제접했다. 통도사 가람 수호에도 힘을 기울였던 스님은 1982년 7월 17일에 문도들을 모아놓고 '야반삼경에 대문 문빗장을 만져보거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입적했다.
통도사 개산조 자장스님은 뛰어난 건축가였으며, 통도사는 자장스님의 '3개의 중심 혹은 3개의 영역' 개념이 철저하게 적용된 건축물이라는 분석이 김봉렬 건축학교수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통도사는 한국불교의 모든 신앙요소와 교리적 체계가 공존하고 있으며, 자장스님은 이들을 하나의 사찰에 수용하기 위해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 등 개별의 고유 성격과 가치를 지닌 3개 영역의 완결체를 이들이 모인 삼로전이라는 또 하나의 완결체로 구축한 독특한 건축적 방법론을 적용했다고 분석했다. 자장스님의 탁월한 건축적 수법은 중첩과 분절, 연속이라는 정교하고 교묘한 양식을 전체적으로 완벽한 통일성을 이루게 하고 있고, 휘어진 축들은 건물들의 입체적 중첩은 물론 공간적 규모까지 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건물의 차원과 건물군 차원에서 부분들을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엮어나가는 자장스님의 건축론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전체성 아래 부분들을 조절해 나갔던 유교건축과는 상반된 양식이라는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첫째 삼로전 각 영역의 구성에는 교리적 원리가 깃들어 있고, 둘째 이들 각각의 건물군은 단일한 중심통로로 전체화되며 여기에 3개의 남북축이 부축을 형성, 시각적인 변화와 중첩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하로전에서 상로전까지의 크기가 5,4,3의 비율로 엄격한 건축적 기준이 적용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자장스님이 사찰건축에 적용했던 '3개의 중심 혹은 3개의 영역' 기본개념에는 계율과 장엄이라는 일관된 사상이 투영돼 있으며, 황룡사의 3개 금당 등에서도 이와 같은 기본개념이 잘 나타나 있음도 부연했다.

통도사 가람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일주문이 있는 입구쪽부터 말하자면, 우선 영산전, 약사전, 극락전으로 이루어진 하로전 지역이 나타난다. 그 다음 일주문을 지나면,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이 일렬로 서있는 중로전 지역이 있고, 최종적으로 대웅전과 금강계단으로 이루어진 상로전 지역이 있다. 노전이란 사찰의 중요한 불전을 관리하는 노전스님이 기거하는 곳으로, 통도사에 상중하 3개의 노전이 있다는 것은 3개의 가람이 합쳐진 복합 사찰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만큼 통도사 가람은 거대하고 복잡해서, 통도사 건축을 제대로 해석할 수만 있다면 한국 사찰 건축의 비밀을 밝힐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이 가운데 특히 중로전 지역이 눈길을 끈다. 3동의 커다란 건물들이 일렬로 서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하로전의 세 불전들과 같이 서로 직각되게 놓여있는 가운데 마당을 형성하면서 가람을 이루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앞 뒤 일렬로 놓이다보니 전각과 옆면을 돌아 들어가야 하는 어색함이 있다. 그리고 용화전 앞에는 밥그릇과 같이 생긴 탑이 서 있다. 중로전 제일 뒤쪽에 있는 대광명전은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화엄신앙의 불전이고, 그 앞의 용화전은 미륵불을 모신 불전이며, 가장 앞의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보신 전각이다. 용화전 앞에 서 있는 흔치 않은 사발 모양의 탑은 일명 봉발탑이라고 불리우는데, '바릿대를 바치고 있는 탑'이란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제자인 가섭존자에게 자신의 바릿대와 가사를 주면서 '가섭아 너는 열반에 들지말고 내 발우과 가사를 56억 7천 만년 후에 미륵불이 용화세계를 열 때 발우와 가사를 바쳐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가섭존자는 지금도 계족산에서 바릿대를 들고 미륵불의 용화세계 건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용화전과 봉발탑은 가섭존자가 미륵불께 바릿대을 바치는 바로 그 용화세계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경전에 있는 내용을 입체적이고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중로전의 세 건축물은 동시에 지어진 것이 아니고, 대광명전은 신라시대, 용화전과 봉발탑은 고려시대, 관음전은 조선 후기에 건축된 것이다. 중로전 일대가 완성되기까지에는 천년이 넘는 시차가 있었지만 여기에는 일정한 건축적 질서가 유지된다. 가장 먼저 자리잡은 대광명전은 가장 크고 높다. 용화전은 그보다 약간 작고 낮게 건축되었고, 가장 나중에 세워진 관음전은 아예 3칸으로 칸수도 줄이고 지붕도 제일 낮게 건축되었다. 세 건물은 앞뒤로 나란히 서 있지만, 새 건물이 옛 건물을 가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건축되었다.
관음전 앞에 서 보면 3동의 불전들이 이루는 관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새로운 것을 만들되 결코 옛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정신, 이 것이야말로 한국건축예술의 위대한 윤리요, 현대가 받아들여야 할 소중한 교훈임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한다.
끝으로 이 번 문화재 답사 및 성지순례를 통해 이와 같은 위대한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선배보다는 후배가 더 발전하고 빛이 나되, 자세를 조금 낮추어 그 빛 뒤에는 선배의 그늘이 있음을 간직할 줄 알고, 아름다운 질서 속의 전통을 멋지게 이어 나가는 대한민국 전통문화재 조각회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재약산 표충사

표충사는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창건은 신라 제 29대 무열왕 원년(654)에 원효대사께서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명산을 찾아 이곳 재약산정에 오르니 남쪽 계곡 죽전수림에 오색상운을 보고 이 곳에 절을 짓고 사명을 죽원정사라 하였다고 한다.
재약산 정면은 향로봉, 마지봉, 법수봉이 있고 우측은 재약봉, 문필봉, 보현봉, 관음봉, 지장봉, 미륵봉, 사자봉이며 좌측에는 수미봉, 화엄봉, 미타봉이며 전향산문에는 노적봉과 백마봉이 있고 구천의 냇물과 구봉 등의 백호 천용이 중첩 수호하는 형국이니 실로 천진불당이라 하였다.

신라 42대 왕인 흥덕왕 4년(829) 인도의 고승 황면선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천하명당을 찾을 때, 이곳 재약산에 이르러 살피니 산하계곡에서 오색상서가 오름을 보고 비로소 부처님 인연지라 하고 주석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흥덕왕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와 명약을 찾으니 풍전에 죽원정사에 황발선인이 주석한다하여 찾아와 병을 치유하니 일조에 완쾌하여 국왕이 죽원정사를 친히 방문하여 크게 칭송하니 사양하며 "산초와 류수가 모두 약초요 약수"라 하니 국왕이 감탄하여 탑을 세우고 가람을 부흥시키며 사찰명을 재약산 영정사라 개칭하였다 한다.

표충사는 신라 50대 진성여왕 3년(889) 보우국사께서 승려 오백여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니 "국내제이선찰"이라 불리어 졌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보각국존 일연스님께서 주석하니 1000여 명의 대중들이 운집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었다. 충렬왕 12년(1286) 국왕이 친방하여 "일국지명산이요 동방제일선찰"이라 명명하였으며 이때쯤 일연스님께서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탈고하니 때가 1289년 충렬왕 15년 3월이었다.
표충사는 보우국사, 해진국사, 보각국존일연국사, 천희국사 등 사대국사께서 주석하신 사찰이 되었다.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 때 천년보찰 모두가 전화를 입어 수많은 승려들은 의병승으로 동참하게 된다. 왜적이 마지막 퇴각할 때 사명대사께서 왜군의 재침을 막기 위하여 표충사에 의병승 훈련소를 설치하여 의병승을 훈련시키고 많은 승리를 거두어 호국불교 상징의 사찰이 되었다.
1681년 주지 도한스님께서 신일스님과 계화스님 등의 힘을 모아 명부전을 복원하고 부속건물을 보수하였다. 이때 표충사는 팔법당 사지전 십칠부속 건물과 십오개 암자를 두었다. 암자명은 대원암, 내원암, 진불암, 서상암, 한계암, 지장암, 미타암, 적조암, 남무암, 약수암, 사자암, 청하암, 극락암, 홍제암, 동상암 등이 있었다. 이어서 조선후기에 거듭되는 불교 탄압에 사역과 관폐가 극심하여 사찰의 재정도 피폐해지고 대중들도 흩어지니 사찰의 정세는 극심히 기울게 되었다.
1800년에는 대광전, 명부전, 관음전 등 4개 법당과 원통요, 남계요 두 요사와 산내는 내원암, 동상암, 서상암 등의 암자와 비비정만 남았다.
1839년에는 사명대사 팔대 법손 태허당 남붕화상께서 삼강동 현 경남 밀양시 무안면 중산리 영취산 백하암에 있던 표충사당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 삼대선사께서 주인없는 폐허된 모습에 통탄하고 당시 밀양부사의 협조를 얻어 사당을 연정사 큰 사찰로 옮길 것을 상소하니 국왕께서 윤허하여 월파당 천유화상께서 영정사내로 옮기므로 표충서원으로 추증 사액하였다. 이때에 국왕은 표충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리면서 사관을 보내 국왕을 대신하여 춘추제향을 올리게 하고 제비는 국비로 하며 사내의 대중들은 사역과 조세를 면제토록 하였다. 당시 이건 내용을 보면 관음전을 헐고 사당을 지어 삼대선사의 위패를 모시고 명부전을 헐고 영각을 지어 삼대선사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또 칠문의 정문을 개조하여 '의중당'의 현판을 달고 그 좌우에 방사를 넣어 동서재로 삼고 사명당?영각?의중당을 중심으로 예제문, 자하문, 수충루 등의 부속건물을 신축하여 서원의 특징을 갖추고 사찰 이름을 재약산 표충사라 개칭 사액하였다. 당시 월파선사는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맡아 전국 사찰의 승려들을 규정하였다.

근·현대에 이르러 왜정 때인 1911년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공포한 "사찰령"에 의하여 표충사는 통도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1926년 큰 화재가 일어나 가람이 전소되고 응진전만 남은 것을 2년 후에 대광전, 표충서원, 명부전, 관음전 복원불사를 시작하여 1929년에 완공하고, 1938년에는 주지 구연운화상이 대광전에 칠척 목조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로서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가지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국내 가장 큰 규모의 비구니 종립특별선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창건연대는 신라 제 41대 왕인 헌덕왕(809-826)대에 한국에 최초로 선을 도입한 도의국사가 영산 명지를 찾다가 이곳 가지산의 법운지를 발견하고 터를 정한 뒤, 신라의 호국을 염원기도하기 위해 824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도의국사는 신라 제 37대 선덕왕 1년(780)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당지장선사의 제자가 되어 그 불법을 물려 받고 법호를 도의라고 개명한 뒤 821년에 신라로 금의환향하여 최초로 선문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남종선의 시조가 되었으나 신라에서는 아직 그의 혁신 이념을 이해하지 못하여 설악산 진전사에 들어가 제자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다가 3년 만에 석남사를 창건하고 9산 선문 중의 하나인 가지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석남사라는 이름은 가지산을 석면산이라고도 하는데 이 산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고헌산맥은 강원도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뻗으면서 줄달음질을 치다가 도중에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산을 형성한 뒤 다시 뻗으면서 형성되는데,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천황산, 영취산 등의 명산 명봉들을 이루어 놓고 있다. 가지산에는 석남사, 신불산에는 간월사, 영취산에는 통도사 등의 명찰들이 자리하고 있어 불심과 영통한 법운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극락전, 강선당, 조사전, 심검당 등 30여 동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건물로 1791년(정조 15년)에 세운 극락전이 있으며 순조 3년에 세운 대웅전이 있다.
문화재로는 도의국사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 369호 석남사 부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2호 삼층석탑, 조선초기의 엄나무구유, 돌구유 등이 있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중건중수를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그 후 1674년(현종15년) 언양현감 강옹의 시주로 탁영, 지운, 의철, 태주가 중창하였고, 진혜, 쌍원, 익의, 성진이 단청하였으며, 동시에 종과 북 등의 불구를 마련하였다. 이어 정우, 각일, 석맹 등이 극락전, 청풍당, 청운당, 청화당, 향각을 증축하였고, 희철선사가 명부전을 세웠다. 1803년(순조 3년)에 침허, 수일선사 등에 의하여 중수되었으며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졌다가 1912년 우운스님에 의하여 다시 중수된 바 있으나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어 그나마 남아있던 신라고찰의 모습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1957년 비구니 인홍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먼저 대웅전, 극락전, 그 밖의 부속시설을 중수중창을 하고 다음에 종각, 침계루, 심검당 등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케 하였다. 크게 각 당우를 일신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비구니들의 수도처로서 많은 비구니들이 정진하는 도량으로 거듭났다. 이곳의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국사가 호국의 염원아래 15층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197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사리 1과를 봉안하면서 3층으로 개축한 것이다.
  22회 문화재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