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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회 문화재답사
  조각회   2009-07-02   1693




삼화사는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176번지 두타산(頭陀山)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두타산(1351m)은 모든 욕망을 버리고 수행에 전념함을 뜻하는 불교의 두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넓은 바위와 맑은 연못으로 둘러싸인 무릉계곡의 아름다움이 바로 옆에 있어 삼화사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창건설화는 『삼화사 사적』.『진주지』.『척주지』등에 전해오고 있다.
『삼화사 사적』.『진주지』등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율사가 산문을 열고 사명을 흑연대(黑蓮臺)로 하여 창건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말 구산선문중 사굴산문의 창시자인 범일국사가,
『척주지』에는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범일국사가 산에 들어와 불사를 하여 삼공암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과 아울러 현존하는 유물들을 감안하면 삼화사는 대체로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화사의 원래 위치는 동쪽 약 1.3km의 반릉 부근에 있었는데 사찰을 포함한 인근지역 일대가 1997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의 채관권내에 들어가자 무릉계곡내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선경이면 무릉이라 했을까!
무릉계곡은 동해시 삼화동 남서쪽에 마치 좌청룡 우백호처럼 자리 잡고 있는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아래 호암소로 부터 시작하여 약4km 상류지점 용추폭포가 있는 곳 까지를 말한다.
넓은 바위 바닥과 바위 사이를 흘러서 모인 넓은 연못이 볼만한 무릉계곡은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매표소를 지나면 무릉반석이 나오는데 이 넓은 반석에 한문이름이 많이 새겨져 있다.

조선전기 4대 명필가의 한사람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한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의 기념 각명이 1,500여평의 무릉반석 위에 새겨져 있다.
이글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반석에 올라 가까이에서 보는 것 보다는 금란정 바로 옆 무릉반석 내려가는 길 왼편으로 있는 좌대 같은 바위에서 바라보면 한눈에 잘 보이며 특히 양사언의 초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되어 동해시를 대표하는 여행명소인 무릉계곡은 높고도 험한 고봉들의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들이 모여서 빚어낸 계곡으로 신선이 노닐었다 해서 일명 무릉도원이라고도 불린다.
흑연대, 또는 삼공암이라 불리던 삼화사가 삼화사로 처음 불리우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서다.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많은 전쟁을 거듭했던 왕건은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재산을 잃고 피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불교의 힘을 빌렸다.
희생된 영혼을 위해 논산 개태사를 비롯한 전국 사찰에서 천도재를 지내는 등 민심을 위로했던 것이다.
이런 왕실의 후원으로 몇몇 사찰이 급격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삼화사도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사찰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삼화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여러 가지 창건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삼화사는 고려 공민왕 16년(1367) 풍우로 퇴락된 것을 란옹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의 방화로 전소되는 비운을 맞는다.
현종 원년(1660)에 지금의 중대사 터로 이건하여 중대사로 불리었다가 영조 24년(1748) 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중건되어 삼화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순조 20년(1820)에 또다시 절과 부속암자들이 전소되었다가 1824년에 조회염 스님이 중건하였다.
이와 같이 여려 차례의 소실과 중창을 거친 삼화사는 1905년에 삼척지방 의병들의 거점으로 이용되었으며, 1906년 일본은 의병의 거점파괴라는 이유를 붙여 대웅전, 선당등 200여칸에 이르는 건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2년 후인 1908년 대웅전, 요사채, 칠성당 등을 다시 건립하여 유지해오다 안타깝게도 1977년에 개발지역에 편입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삼화사의 원래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지와 기단축대, 초석일부가 지표에 노출되어 있고,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기와조각과 백자 등의 파편이 산재되어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현재의 삼화사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범종루, 육화로,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 철조 노사불좌상(보물 제1292호), 목조 지장보살상, 부도 및 비가 있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회암 재질로 2층의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의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균열이 많지만 기단부에서 찰주까지 전체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통일신라 전통양식의 3층 석탑이다.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등 상륜부는 훼손되어 있지만 찰주까지의 높이는 480cm이고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단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탑신에 비해 기단석이 비교적 높으며 기단의 네면 모서리와 가운데에는 기둥 모양인 우주와 탱주가 있고, 기단 맨 위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얹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옥개석은 1.2층의 높이를 거의 같게 하고 폭을 조금씩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낙수면의 경사가 급한 반면 추녀 부분에서 완만해지며, 끝이 살짝 올라간 모습이다.
기단부의 구성이나 탑신 괴임, 옥개석의 조성양식과 수법으로 볼 때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1997년 4월 대웅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했는데, 윗 층 기단 안에서 나무로 짜인 함이 발견되었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철조 노사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고불이다.
시멘트로 만든 대좌위에 머리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복원하는 과정에서 오른쪽 등 쪽에 10행 161자로 쓰인 글이 발견되었는데,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두 번이나 쓰여 있어 이 불상의 명호를 노사나불이라 부른다.
이 불상을 조성할 때 시주자가 부모를 위해 조성했고, 『화엄경』을 토대로 했으며, 880년대에 활동한 결연스님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삼화사의 철불은 많은 영험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중 『진주지』에 실린 것을 소개해 보면
조선 순조 때에 산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고 철불만 동그라니 남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불손한 생각으로 철불을 훔쳐서 나가려 했다. 그때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아 혼비백산해 철불을 내려놓고 갔으며, 다른 도둑이 철불을 훔치러와 철불이 워낙 무거우니 한쪽 팔을 잘라 도망가다가 신장으로부터 철퇴를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뒤늦게 불상의 팔이 없어진 것을 안 스님들이 불상의 팔을 찾아 이리저리 산속을 뒤져 이를 발견하고 법당을 새로 짓고 불상을 보수하여 봉안했다고 전한다.
또한 삼화사 철불은 약사전에 약사여래불상으로 오랫동안 모셔져 왔었다.
어느 해 산사태로 중대사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는데 이때 이곳 약사전에 모셔져 있던 철불도 매몰되고 말았다.
한참 후에 중대사 터에서 밭을 일구던 농부에 의해 발굴되어 삼화사로 옮겨졌다. 삼화사에 철불이 돌와왔다는 소문이 나자 어느 날 한 골동품 장사가 찾아와 철불을 팔라고 하였다. 당시 삼화사 주지는 성암 화상이었고, 신도회장은 김대승씨였다고 한다.
김대승씨는 불상을 골동품으로 매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골동품상은 스님 몰래 철불을 훔쳐 가마니에 싸서 묵호로 가지고 나갔다. 그 골동품상은 운임이 모자라 철불을 역에 맡기고 돈을 구하러 영주로 갔다. 이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묵호에 주재하던 어떤 기자의 꿈에 가마니에 싸인 철불이 보였다. 그는 꿈속에 일이 신기해 역으로 나갔더니 과연 가마니가 보였다.
기자가 역무원에게 물으니 화물을 맡긴 사람이 운임을 구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경찰에 연락을 해서 철불을 지키고 있던 고물상의 아내를 취조하게 했더니 훔친 것으로 판명되었다. 골동품상과 그의 아내는 철창으로 가는 신세가 되었다.
다시 돌아오게된 삼화사 철불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견디며 지금도 그 옛날의 자비로운 모습으로 불자들의 귀의와 존경을 받으며 법당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두타산 삼화사가 소재한 강원도 동해시는 1980년 4월 1일에 태어난 도시다.
21세기 환 동해 경제권의 중심도시를 건설함으로써 균형 있는 국토 개발과 새로운 동해안 시대를 개척하겠다는 국가 계획에 따라 기존의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을 통합하여 신도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조선시대 숭유배불정책 속에서도 이 지방은 지방 관리나 주민들이 역사적으로 삼화사와 매우 친화적이었다.
삼척부사 김효원이 남긴 『두타산 일기』는 두타산을 유람하면서 스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일과 함께 삼화사가 훼손된 사실을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슷한 내용은 이 지방 유학자들이 두타산을 둘러보고 쓴 다른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삼화사가 쇠락하고 있는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거나 스님들에 대한 우호적인 표현을 남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찰이 불에 타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적극적으로 중창불사에도 참여한다.
이것은 이 지방에서 불교와 유교가 대립하기 보다는 조화로운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역민들의 향토에 대한 사랑도 남달라 특이할만하다.
80세에 정승을 지낸 유명한 인물인 허목(許穆, 1595~1682)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1662), 이 지역의 인문과 역사를 정리한 『척주지(陟州誌)』를 지어 남긴 것을 비롯해 김종언(金宗諺)의 『척주지』.『삼척군지』.『진주지』등 향토지가 무려 5종이나 된다.
이는 지역민들의 향토애를 짐작케 하는 자료라 할 것이다. 이들 향토지에는 삼화사가 언제나 내고장의 자랑스러운 절로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삼화사가 동해시의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친화적인 사찰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21회 문화재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