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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회 문화재답사
  조각회   2007-11-01   2361

제 19회
문화재 답사
마곡사, 갑사, 신원사


자료정리 : 송 근 영

대한민국 전통문화재 조각회
 

태화산 마곡사

마곡사는 공주시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소지는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567번지이다. 일제시대에는 충청지역을 관장하는 31본산의 하나로 자격을 지켜왔던 마곡사는 현재 조계종 제 6교구 본사로 수덕사와 함께 충남지역의 불교계를 이끌고 있는 사찰로 자리매김해 오고 있다.

마곡사의 창건은 자장스님과 체징스님의 창건설이 전해 오는데 현재의 마곡사는 자장스님의 창건 설을 따르고 있다. 마곡사의 역사를 전하는 옛 기록으로는 조선 철종 2년(1851)에 임원모가 저술한 <태화산 마곡사 사적입안>과 찬술연대와 찬술한 사람을 알 수 없는<선교양종대본산 마곡사 연기략초>가 있다. <사적입안>에는 당에서 귀국한 자장 스님이 선덕여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밭 이백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해 장소를 찾다가 선덕여왕 9년(640)에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곡사의 위치가 백제의 중심부인 웅진성(공주)부근에 있다는 점이 설득력을 적게 하고 있다. <연기략초>에는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개조 체징 스님의 창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체징 스님이 당나라의 마곡 보철 스님에게 법을 전해받고 귀국하여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절을 청건하고 사명을 ‘마곡’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 마곡사는 공식적으로 자장스님 창건 설을 따르고 있다. 창건 이후 체징 스님과 범일, 도선 스님이 마곡사를 각기 중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사적입안>

마곡사는 창건이후 수 차례의 전란과 화재로 폐사가 되는 등 수난의 역사를 거치면서도 법맥이 끊이지 않았다. 폐사되었던 마곡사에 법등을 다시 밝힌 스님은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다. 스님은 명종 2년(1172)에 왕의 명을 받아 제자 수우 스님과 함께 마곡사를 중창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60여 년간 폐사지로 방치 되었던 것을 효종 원년 공주 목사 이태연, 각순, 지원 스님 등에 의해 복원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다시 정조 6년(1782)에 큰 불이나 대법당을 비롯한 1천5백여 칸에 이르는 전각이 불타는 비운을 맞이하기도 했다.

마곡사의 가람 구조는 화엄만다라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학자도 있고 주불이 법당의 서쪽 끝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모습이 부석사, 화엄사, 범어사 같은 화엄십찰에서 보이는 모습이므로 마곡사도 역시 화엄도량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마곡사에 주석했던 고승으로는 이미 언급한 자장? 체징? 범일? 도선? 지눌 스님외에 매월당 설잠? 보경 혜경? 금호 약효? 만공 월면 스님 등이 있다.

범일 스님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산조이다. 스님은 왕자 김의종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염관 제안 스님과 약산 유엄스님에게 참학했다. 그 뒤 문성왕 12년(850)년 귀국해 명주도독 김공의 청으로 사굴사(또는 굴산사)를 세우고 종풍을 드날렸다.

설잠 스님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분이다. 스님은 세조 원년에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통곡한 후 책을 불사르고 출가했다. 스님은 양주 수락사와 경주 용장사 등지에서 머물렀다.

한때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왔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 스님은 무량사에서 입적했는데, 저술로는 <매월당집>, <화엄일승법계도주>, <조동오위요해>등이 있다. 마곡사 영산전의 현판은 스님을 만나러 온 세조가 쓴 친필이라고 전한다.

혜경 스님은 전라도 용담 사람으로 순조 34년(1834)에 화암사에서 득도했다. 스님은 여러 강원을 다니면서 경론과 선을 배웠으며, 춘담 대연 스님의 법을 이어 청허 휴정스님의 13대 법손이 되었다.

약효 스님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금어인 의겸 스님의 화맥을 이은 스님으로 보응 문성→김용 일섭→해봉 석정으로 이어지는 조계산맥의 거두이다. 스님은 마곡사에 주석하면서 활동했는데, 국사전 옆에 있는 비석 <금호화상헌답기>에는 스님이 금어로 일하면서 모은 논 49필과 밭 12필 등을 마곡사에 헌답했던 사실이 기록돼 있다.

마곡사를 찾아가는 길은 설레임이다. 그것이 요즘과 같은 화창한 날씨이면 더욱 그러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던 차가 멈추어 선 골짜기엔 싱그러운 풀내음과 나뭇잎이 푸르름을 더해가고,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시냇물은 절 마당을 가로지르며 대자연을 노래한다. 

소담스런 산에 아늑히 둘러싸인 마곡사는 순례자의 마음을 머물게 하는 그런 절이다.

 

마곡사 대광보전

대광보전은 보물 제802호로 뒤쪽의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   전이다. 원래의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순조 13년   에 다시 지었다. 대광보전 바닥에는 참나무로 만든 돗자리가 깔려   있다고 한다. 대광보전 안의 비로자나불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   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스님과 신도들이 많아서 사진을 찍지는   못했습니다.) 건물 내부의 화려한 공간 구성과 함께 조선 후기 건   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전통 목조건물이다.

 

마곡사 대웅보전

마곡사 대웅보전은 마곡사의 대광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이다. 현재의 건물은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와 공주목사 이주 연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외관상으로는 2층 건물 형태이 나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불 을 모시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현존 하는 전통 목조 건물 중에 많지 않은 중층 건물로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마곡사 웅진전

마곡사 응진전은 문화재자료 제65호로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을   모신 곳으로 나한전이라고 한다. 응진전은 철종 3년(1852)에 다시   수리한 것으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마곡사 명부전

마곡사 명부전은 문화재자료 제64호로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염라대왕상을 비롯하여 십왕(十王)을 모신 곳으로 십왕전, 지장전, 명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불교에서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을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은 보살이다. 십왕은 인간이 죽은 후에 지옥에서 죄가 많고 적음을 가리는 10명의 왕으로 염라대왕은 그 중의 다섯 번 째 왕이다. 주존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십왕상을 모시고 있다.

 

계룡산 갑사

갑사는 충남 공주시 중장리 계룡산(845m)자락에 아늑히 자리 잡고 있다.

계룡산은 신라 5악의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묘향산, 지리산과 함께 계룡산에 중악단을 설치해 봄, 가을 산신제를 올렸던 신령스런 산이다. 닭 벼슬을 쓴 용과 같은 형상을 했다 해서 ‘계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계룡산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천황봉(845m)을 중심으로 쌀개봉(828m), 연천봉(740m), 문필봉(796m), 자연성릉, 삼불봉(750m)등이 호위하듯 펼쳐져 있는 산세에 곳곳에 문화유적들이 있다.

갑사의 창건연대는 420년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과 556년 혜명 스님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679년 의상대사가 대대적으로 중수해 화엄의 높은 교학을 펴 화엄십찰의 하나가 됐다. (화엄십찰은 태백산 부석사, 중악 공산 미리사, 남악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 보원사, 계룡산 갑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모악산 국신사, 한주 부아산 청담사, 원주 비마라사)

기록을 보면 1410년 갑사에는 70여명의 승려가 수행을 했던 청정도량 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건물들이 소실되어 중창을 거듭해왔다. 

1738년에 표충원이 세워져 서산, 사명, 영규 스님의 영정을 모셨고 1899년에는 적묵당이 신축됐다. 신라시대 조성 된 것으로 알려진 철당간 및 지주는 보물 제 256호이고 대적전 앞의 부도는 보물 제 257호 동종은 보물 제 478호다. 선조 2년에 조성된 월인석보판본(보물 제 582호) 이밖에도 표충원 대웅전, 적묵당, 삼성각, 팔상전 등 당우가 충남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있으며 대웅전 안의 보탑등 성보도 충남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있으며 대웅전 안의 석조약사여래입상과 석조보살입상, 갑사사적비, 영규대사비, 천진보탑등 성보도 충남문화재 자료로 지정됐으며 영규대사 묘는 충남도 기념물이다. 1583년에 주조된 갑사 동종은 일제에 공출되기도 했으나 광복 후 인천에서 다시 찾아왔다.

  갑사 공우탑은 백제 비류왕 4년 계룡산의 한 암자를 건립할 때 자재를 운반하던 소가 죽자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임진, 정유 양난을 격은 후 중창불사 때 세워졌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현재 탑은 대적전으로 건너가는 개울가에 세워져 있지만 원래의 자리는 아니다.

갑사에서 동학사를 이어주는 등산로를 30분정도 걸으면 신흥암이 나온다. 이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천진보탑이 있다. 절벽위에 우뚝 솟은 보탑은 충청도 유일의 보궁이며 신흥암은 영험있는 기도 도량으로 감춰져 있다.

천진 보탑은 천진이라는 말 그대로 산에 손이 안간 곳에 도력으로 진신사리를 옮긴 탑을 말하는 것이며, 빈두루존자께서 천하를 살펴 명지를 찾다가 계룡산 바위에 도력으로 사리를 옮겼다고 한다.

14대 조사인 용수보살의 대지도론에 천진보탑의 유래가 적혀있으며 대표적인 천진보탑이 1400년전 아도화상이 부처님 전신사리가 모셔져 있음을 발견하고 신흥암을 창건하고 정성스럽게 모셨다고 한다.

계룡산 최고 명당에 자리했다는 신흥암, 금계포란형(닭이 알을 품고 있는 자리)으로 절을 가운데 두고 봉우리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작은 수정봉-수정봉-연화봉-작은연화봉으로 이어지며 신흥암을 외호한다. 특히 수정봉의 독수리바위와 연화봉의 장군바위는 천진보탑을 지켜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천진보탑은 신비한 방광으로도 유명하다. 진실한 마음을 내어 간절하게 기도하면 천진보탑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방광을 할때면 산불이 난줄 알고 소방관들이 출동하기도 하기도 했다.

신흥암 뒤쪽에 있는 ‘난터굴’은 ‘나한터굴,이란 말이 변한 이름으로 나한님들을 모신 굴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비로전으로 나한님들을 옮겨 모셨고 만공 스님이 난터굴에서 수행한 일화가 전해진다.

 

입구에서부터 갑사를 지나 용문폭포에 이르는 약 2킬로   미터 구간은?'갑사 오리숲'이라고 불리는데 ?수령 150년   이상 되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봄철의 신록   도 좋지만 가을의?단풍은 절경이다.

 

갑사 강당

광해군 6년(1614)에 창건한 건물로 승려들이 불경을 학습하거   나 법회를 갖던 곳이다. 대체로 강당은 대웅전 뒤편에 위치하는   것 이 보통이나 갑사의 강당은 대웅전 앞쪽에 있는 것이 특징인   데 원래 정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후에 강당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된 연유라고 한다.

 

월인석보 판본 보장각

보물 제582호로 지정된 선조2년(1569)에 새긴 월인석보 판목   이 보관되어 있다. 원래 논산군 불명산 쌍계사에 보관하였던    것을 일제시기에 갑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월인석보는 세종이 지은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설명부분으로 하여 세조 5년(1459)에  석가의   생애와 공덕을 찬송한 글이다. 누렁개 한 마리와 검둥개 한 마   리가 건물 좌우에 앉아 보물을 지키고 있다.

 

갑사 팔상전

팔상전은 석가여래의?일대기를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   화를 모시는 전각인데 갑사 팔상전은 그 중 신중탱화 한 폭만 봉   안하고 있다고 한다.?

 

갑사 대웅전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 충남   유형문화재 제105호.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불전으로 정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의 다포집이다.

 

진해당

선방? 겸 스님 처소로 쓰이는 진해당 건물. 흙마루 앞쪽으로?나 있는 두개의 작은?문이?눈길을 끈다.

 

갑사 부도

종목 : 보물 제257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 : 1기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갑사
시대 : 고려시대
소유자 : 갑사
관리자 : 갑사

 

갑사 뒷편 계룡산에 쓰려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며 3단의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높직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윗층은 차츰 줄어들었다.
아래받침돌은 사자·구름·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으며, 거의 원에 가까운 가운데받침에는 각 귀퉁이마다 꽃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새겨 놓았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탑 몸돌은 4면에 문모양과 그 안에 자물쇠를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두드러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는 등 지붕모양을 정교하게 모방하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후에 새로 만든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힘차고 웅대하나, 윗부분으로 갈수록 조각기법이 약해졌다.
특히 지붕돌이 지나치게 작아져 전체적인 안정감과 균형을 잃고 있다.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에 조각된 각종 무늬와 기법 등은 고려시대 부도탑들 중에서도 우수작으로 손꼽을 만하다.

 


계룡산 신원사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8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신원사는 갑사 동학사와 더불어 계룡산 3대 사찰로서 창건연대는 백제 의자왕 11년(651)에 보덕화상께서 창건하였다 한다. 그 후 여러번의 중창을 거쳐 1876년 보련화상이 고쳐짓고 1946년 만허스님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신원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원래의 건물이었던 곳은 신원사와 중악단 남쪽에 펼쳐진 밭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금당지로 믿어지는 지역을 중심으로 오층의 석탑이 세워져 있어 본래의 신원사 자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금당지를 중심으로 석탑이 있는 이외에 현재의 신원사는 대웅전과 좌측에 영원전이 있고 우측의 독성각이 있고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 대신 아미타물과 좌협시 관세음보살 우협시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건물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80호로서 조선 고종13년(1876)에 보련화상이 지은 건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로서 다포양식에 팔작지붕으로 처마의 끝을 살짝 올려 우아한 기풍이 느껴진다.

오층석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31호로서 현재는 4층 옥개석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2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을 올렸던 것으로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는데 이것은 목조건물의 양식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석탑이 목탑에서 변천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거의 수평이며 석탑의 서쪽에는 배례석이 마련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중후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고려 전기에 세운 석탑으로 1975년 12월 탑의 해체? 복원 공사 당시 1층 몸돌에서 사리구와 함께 개원통보, 함원통보, 황송통보, 주둥이와 손잡이가 깨어진 자기주전자, 녹색 유리로 만든 목이 긴 병 등이 발견되었다.

신원사 대웅전에서 약 50여미터 거리에 ‘계룡산 중악단’이 있는데 묘향산, 지리산과 함께 한국 산악신앙의 제단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주변의 암자로는 고왕암, 등운암, 선광원, 불이암, 금용암, 소림원 등이 있다.

 

백제 의자왕 12년(652년)에 '보덕화상'이 창건한 계룡산 3대 사   찰 중 하나로 꼽는 '신원사'는 가서보면 실상 아주 소박하고 아담   한 절로서 주차장에서 사역(寺域)까지의 진입로도 아주 짧고노변   에 주민의 집이 연이어 여러 채 있어서 마을길 같이 여겨진다.

 

대웅전

조선 1876년(고종 13)에 중건한 신원사의 중심 불전으로 아미타삼존불을 모시고 있으나 현판은 '대웅전'으로 되어있다. 아미타 삼존불은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로서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전각은 주로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의   명칭을 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

 
 

중악단

‘중악단’과 그앞의 원래 금당터

크게 천왕문 너머의 대웅전 권역과 그 오른쪽의 '계룡산 중악   단' 권역으로 나뉘는 신원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지었고 고종 13년(1876년)의 중건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원 금당 터는 중악단 앞에 있는 오층   석탑이 세워져 있는 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노사나불 괘불탱 (국보 제299호)

대웅전의 전면 중간 두 기둥의 안(실내) 쪽으로? 당초문의 화려한 단청을    한 낙양각 형식의 긴 선반 받침을 창방까지 높이 고정시키고 그 위에 얹은   장대한 괘불궤 속에 보관하고 있다. 조선 인조22년(1644년)에 제작된 길이   11.18m, 폭 6.88m 크기의 이 괘불 화기(畵記)에는 '원만보신노사나불'이라   는 존명과 함께 '대영산회탱'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으며 화엄종의 주불   인 '비로자나 불'을 대신하여 '노사나 불'께서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을 그린 것이다. 설법인의 수인을 취하신 '노사나불'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시며 부처님의 전신을 둘러10대 보살과 10대 제자 그리고 사천   왕들을 배치하였는데 섬세한 표현과 밝은 색조의 세련된 솜씨로 조선 후기   불화양식을 보여주는 17세기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오층석탑

원래 신원사의 금당 터였다고 하는 중악단 앞쪽 넓은 마당 밑으로 현재 4층이나 원래는 5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5층석탑 한 기가 있다. 신라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두었으며 하대 면석은 우주를 두고 탱주로 양분해서 작은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조각했다. 상층기단 역시 각 면에 우주를 두고 탱주로 양분했는데 면석에 장식은 없다. 탑신부의 각층 옥신 너비는 3층까지 적정한 체감을 보이나 4층만 상당히 줄어들었는데 현4층이 5층이고 원래 4층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높이는 1층에 비해 2층만 급격히 줄었고 2층부터 3,4층은 비슷한 높이를 가져 아주 안정적인 구도이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흐름이 완만하고 얕은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전각이 얇고 반전은 무딘편이다. 상륜부는 모두 유실되어 없다.

 

계룡산 중악단 (보물 제1293호)

사찰의 전각은 아니며 조선왕실의 산신제단이다.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없어짐)과 함께 조선왕실의 기도처였던 중악단은 신원사의 동쪽(대웅전 보면서 오른쪽)에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창건을 명했다고 하며 효종 2년(1651년)에 이르러 제단이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년)에 명성왕후의 명으로 재건되어 왕실주도의 산신 제사를 지냈고 명성황후도 이곳에 와서 친히 기도를 올린 바 있다고 전해지나 세월무상... 지금은 신원사에서 불교식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솟을삼문 좌우로 중문까지 이어지는 2칸의 요사채를 두었으며 마당을 지나 3칸 중문을 들어서면 담장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이 있고 전면에 중악단 본전이 있다.
전체적으로 대문과 중문, 본전의 일직선 축과 좌우대칭에 의한 배치로 인해 엄숙함이 느껴진다.
왕실과 연관된 건물로서 격식을 갖추기 위해 감실 및 기단과 초석 그리고 추녀마루에 잡상(어처구니)을 배열하는 등 궁궐 건축의 기법이 적용됐다고 하는 본전 건물은 정면, 측면 3칸으로서 판벽이며 1칸 너비의 단을 마련해 뒷벽에 붙여서 공간을 확보하고 단상에 네짝 미닫이가 있는 감실을 만들어 계룡산신의 위패와 산신탱을 모셨다.

  20회 문화재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