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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회 문화재답사
  조각회   2006-06-01   2458

제 18회
성지순례 및 문화재 답사
대승사, 김용사, 용문사


일시 : 2006년 5월 27일~28일
자료정리 : 송 근 영

대한민국 전통문화재 조각회
사불산 대승사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에 자리잡고 있는 대승사는 신라 26대 진평왕 9년(587)에 왕명에 의해 창건이 되고 망명(亡名)스님에 의하여 개산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득통기화(得通己和)스님께서 이 절의 조전에 있으면서 반야경을 연구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전소된 뒤 선조 37년부터 숙종 27년 사이에 법당을 비롯하여 승당 동상실(東上室)관음전, 조전, 미륵전, 중실, 시왕전, 향로전, 천왕문, 만세루, 침계당, 금당, 영자전, 향적전, 음향전, 나한전, 청심전등을 건립했다. 영조 원년 의학대사가 삼존불상을 개금했는데 이때 아미타불의 복장에서 사리1과와 성덕왕 4년 기명의 금자 화엄경 7권이 나왔다. 1956년에 실화로 극락전 명부전 산신각을 제외한 대소건물이 전소된 것을 근년에 여러 건물이 복구되어 현재는 참선 도량으로 이름 높은 사찰중의 하나이다.
산내 암자로는 윤필암, 묘적암, 보현암이 남아있다. 문화재로는 목각탱화와 동 관계문서(보물575호), 금동 보살좌상(보물991호), 금자화엄경 7권, 마애보살좌상(유형문화재239호), 사면불암, 나옹부도, 동봉부도, 우부도 등이 있다.
대승사는 사불산(912m)의 중턱에 자리하는 삼한거찰로 한국불교에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찬연한 역사를 지닌 사찰이다.
사불산의 본래 이름은 공덕산이었으나 산꼭대기에 네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고 해서, 혹은 사불이 탄생했다 해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권3에 따르면
“죽령의 동쪽 백여리 지점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진평왕 9년(587)에 홀연히 사면 10자 정도 되는 큰 돌의 사방에 불상이 새겨져서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로부터 산의 꼭대기에 내려와서 방광했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직접 확인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행행하시어, 그 곳에 예경하고 그 바위아래에 절을 짓고 도승인 망명비구를 주석케 하니 이것이 곧 대승사이다. 그러나 도량이 협소하여 망명비구가 현재의 대승사 터에 대가람을 창건하고 대중과 같이 수행하다 입적했다”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지금도 산북면 소야리에서 대승사로 넘어가는 길목에 환희재라고 불리우는 고개가 있는데 진평왕이 이 고개에 와서 사불암의 소재를 확인하고 환희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승사의 창건주인 망명비구는 상주 출생으로 본명이 망명이 아니라 이름을 숨기고 무명승으로 조그마한 절에서 거주하며 늘 법화경을 독송하였는데 그 수행이 뛰어나서 입에서 방광을 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이적은 입적 후에도 일어나 장사지낸 무덤 위에서 쌍연이 용출하였다. 이런 일로 해서 현재까지도 이곳은 천강사불하고 지용쌍연이라는 높은 도예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또 망명비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주인없는 소 한 마리가 어느날 홀연히 들어오더니 아무리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고도 지치지 않았으며 사람이 끌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가고 하더니 불사를 마친 후에는 스스로 죽었다.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부도를 조성하고 우부도라 이름했는데 지금도 대승사 경내에 있다. 이렇듯 기이한 이적을 남긴 사불산에서는 역대로 많은 조사 스님들께서 주석하셨다.
고전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공덕산 아래에 미면사를 창건하여 주석하였고 원효대사는 거기서 약 10리 떨어진 곳에 화장사를 지어 거주하였으며 윤필거사는 윤필암터에 토굴을 짓고 거주하면서 세 성인이 조석으로 만났다고 한다.
이후 고려 때에는 나옹스님께서 묘적암에 계시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고 무학스님의 제자인 함허득통스님은 반야암에 주석하시면서 그 유명한 <금강경오가해설의>를 찬술하였다.
그리고 근세에는 청담, 성철, 자운, 영암스님 등 당대의 큰 스님들이 주석하였다.
창건 이후의 사적에 대하여는 자세치 않으나 <대승사 사적기>에 따르면 선조 37년(1604) 서흥대사가 대웅전 서쪽의 승당을 중창하였고 다시 효종 2년(1651) 경묵대사가 대웅전 동쪽의 선당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인조 8년(1630)에서부터 숙종 29년(1703)에 이르는 사이에 계담, 각인, 선림, 혜탄, 종수, 원웅대사 등 역대제사의 중수가 있었다. 이 때 당시에는 대웅전, 응진전, 관음전, 시왕전, 금당, 요사, 종각, 일주문, 누각, 수각, 주고, 문랑등의 전각이 사불산내에 가득하여 교남의 대가람이 되었다고 한다.
고종 12년(1895) 목각후불탱화를 부석사로부터 이안하여 계속 시비가 일기도 하였으나 결국 대승사에 귀속되었다. 이 후 1922년 여름 뜻하지 않은 화재로 여러 건물이 불타버림에 의운, 취월, 덕산대사등이 정재를 모아 1927년 옛 모습대로 복구하였다. 그러나 1956년 1월에 다시 화재를 입어 극락전, 명부전, 산신각을 남기고 불타버리자 남인, 대휴, 설월, 정안대사등이 힘을 모아 대웅전, 응진전, 선방, 일주문등을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에는 보물575호인 목각후불탱화가 있는 대웅전과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선당인 대승선원, 요사, 일주문, 불화등이 있는데 선당에 모셔진 보물 991호인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은 원래 미면사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미면사가 폐사되자 대승사로 모셔온 것이다.
산내에 상적암, 대비암, 묘적암, 윤필암, 문수암, 보현암, 반야암, 사불암, 미륵암등 9암자가 있었으나 현재는 묘적암, 윤필암, 보현암만 남아있다.
대승사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가 조금 넘는 옛 미륵암으로 추정되는 곳에 증애의 석면에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현재 지방문화재 239호로 지정되어있다.

묘적암
묘적암은 삼화상 중에 한분이신 나옹스님께서 출가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나옹 혜근스님은(1320~1376)까지 활동하셨던 고려말의 큰스님으로서 한국 불교사 연구의 중심에 서있는 분이다. 고려말 선사상의 대성자 또는 실천자로서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며 침체된 고려불교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석가모니불의 후신 또는 조사 봉불의식의 증명법사로 존숭되며 우리나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치신 스님이시다.
나옹스님은 경북 영덕의 산골마을에서 살다가 21세때 친구의 돌연한 죽음을 목격하고 묘적암으로 출가했다고 한다. 당시 묘적암의 요연스님을 스승으로 삼았던 나옹스님은 더 배울게 없자 일본의 고승 석옹스님이 와있던 회암사로 가 석옹스님께 공부하여 2~3년만에 모두 배우고 원나라의 연경으로 들어가 인도 승려 지공대사의 문하로 들어가게 된다. 지공스님에게서도 3년만에 공부를 끝내게 되는데 말하자면 어떤 고승도 나옹스님께는 3년 이상을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원나라 순제임금도 나옹스님을 존경해 연경에 광제선사라는 새 절의 주지로 임명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귀국하여 오대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는데 공민왕의 간청에 의해 회암사 주지 등을 지내다가 50세에 왕사와 조계종 대종사를 맡게 됐지만 마음은 묘적암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것은 명예를 누리고자 출가한 것이 아니라 산승으로서 자유인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출가의 초심이 무엇이었는지 남겨진 선시가 있어 이를 짐작케 한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흰구름 무더기 속에 초막이 있어 앉고 눕고 거닐으니 스스로 한가하다 차가운 시냇물은 반야를 노래하고 맑은 바람, 달과 어울려 온몸이 차다.」 여기 흰구름 무더기 속에 있는 초막이 바로 나옹스님께서 늘 고향처럼 여겼다는 묘적암이었을 것이다. 나옹스님의 부도는 반야샘 옆에 범종모양으로 되어있는데 세월이라는 시간의 손에 의해 몇백년동안에 걸쳐 그려진 돌에 낀 허연 이끼 자국들이 마치 흰구름 문양처럼 생생히 남아있다.
윤필암
윤필거사께서 토굴을 짓고 수행하면서 원효대사, 의상대사와 조석으로 만났던 곳에 윤필암이 지어진 것은 고려 충렬왕 때라고 한다.
윤필암 사불전은 사면불을 향하고 법당은 적멸보궁처럼 무불로 있다. 윤필암은 청담스님의 둘째딸이 출가 수행을 하였던 암자로도 유명하다. 해방전 청담스님께서 진주에 내려가 어느 사찰에서 법문을 하게 되는데 이 소문을 들은 속가의 홀어머니가 그곳까지 찾아와 법문이 끝나자 스님의 장삼자락을 붙잡고 유언을 할 것이 있으니 속가로 가자고 조르며 통사정을 하였다. 유언이라는 말까지 하며 막무가내로 나오는 어머니의 청을 물리칠 수 없어 속가로 가서 어머니의 유언 아닌 유언을 듣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첮째가 딸이므로 손이 끊어지게 됐으니 출가전의 아내였던 차씨 부인과 하룻밤만 자고 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연고로 해서 세상에 나온 그 자식이 이곳 윤필암에서 출가하고 수행을 한 오늘날 수원 봉녕사의 묘엄스님이다. 속가의 어머니도 늘그막에는 청담스님과 차씨 부인에게 죄를 많이 지었다고 자책하며 자식인 청담스님의 안내를 받아 김천 직지사에서 출가를 하여 성인이라는 법명을 받아 승가에 일원이 되었다. 윤필암은 선방인 사불선원이 있는 암자라서 그런지 거룩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비구니 스님들의 손길이 두루 미치어서 정리정돈이 잘 돼있는 고요한 청정함 속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의 무자 화두가 공기중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이 ‘무자’ 없음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때처럼 낀 지독한 찌꺼기들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마음의 지우개일 것이다.
운달산 김용사
김용사는 신라 제 26대 진평왕 10년(588)에 운달조사께서 창건했다.
운달산이라는 이름도 운달스님이 수행의 자리를 잡으면서 지어진 산이름이다. 1000m가 넘는 산정상에는 운달스님이 처음으로 터를 잡아 수행하셨던 금선대가 있다. 금선이라는 말은 금색선인의 준말로 부처님의 별호이다. 임진왜란 때에 완전히 불타는 비운을 맞아 인조 2년(1649)에 혜총선사께서 중건을 했는데 48동의 건물과 14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할만큼 규모가 컸던 김용사는 규모면에서나 역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찰이다. 이러한 김용사는 1997년에 화재로 전각의 상당수가 소실되고 대웅전 및 그 뒤편에 작은 법당들만 남아있다. 원래에는 천왕문 좌측에는 범종이 매달린 봉명루가 있고 오른쪽에는 우물과 요사가 맨앞에 일렬로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 □자형의 설선당과 2층의 김용루각, 해운암,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상주처인 대웅전, 그 왼편에 향하당이 있었었다.
일주문의 주련을 보면 「入此門來莫存知解」,「無解空器大道成滿」
이 문을 들어오거든 알음알이를 피우지 말라. 알음알이 없는 빈 그릇이 큰 도를 이루리라.
즉 사찰을 들어설 때는 세속에서의 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사찰은 무엇을 채우러 오는 곳이 아니라 마음의 ‘비워냄’을 공부하는 수행도량처임을 설명한 글이라 할 수 있다. 비우지 못하여 넘쳐나는 것은 번뇌와 망상과 무명일 것이다.
우리가 사찰에 갈 때마다 지나는 곳이 일주문인데 이 일주문의 의미는 매우 각별한 것이다. 이 문을 경계로 해서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하는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로 나눠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번뇌망상의 세계와 그 번뇌망상을 씻어 맑고맑은 자성을 찾는 세계 사이에 선 문이 바로 일주문인 것이다.
이러한 일주문에 마음속의 세속먼지를 털고 들어오면 알음알이가 없는 텅빈 그릇과 같은 마음에 커다란 도가 충만하리라는 것이 얼마나 희망찬 경고인가. 일체중생이 개유불성이라고 했다.
모든 번뇌망상을 떨쳐버리면 불성에 다가갈수 있고 번뇌망상을 놓지 못하면 중생이니 이 문을 지날적마다 무심히 지나지 말고 불성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깝게 나가겠다는 서원을 다지며 지나가야 할 것이다.
소백산 용문사
용문사는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2리 39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라 48대 경문왕 10년(870) 고승 두운선사가 창건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삼한 통일의 뜻을 품고 남정할 때 이 곳 예천에 들러 두운선사를 방문하고자 동구에 이르니 갑자기 바위 위에서 쌍용이 나타나 절로 가는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용문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고려 명종 원년(1171)에 태자의 태를 절의 왼쪽 봉우리에 묻고 창기사로 고쳤다가 다시 용문사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운선사는 뗏목을 타고 황해를 건너 당나라에 유학하여 제안스님에게 경 율 론 삼장을 배워 신라에 돌아와 두운암이라는 초막을 지으니 바로 용문사에 초건이라 한다.
조선 성종 9년(1478) 소헌왕비의 태실을 봉안하고 1480년 정희왕후가 중수하여 성불산 용문사라 하였으나, 정조 7년(1783) 문효세자의 태실을 봉안하고는 다시 소백산 용문사로 고쳤다. 이 절은 보물 제 145호 대장전, 보물 제 68호 윤장대, 보물 제 729호 용문사 교지, 보물 제 989호 목각좌상 및 부조목각탱, 보물 제 144호 영산회 괘불탱화 등 보물급 문화재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용문사 문화재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한” 대장전
보물 제145호로 지정된 대장전은 고려시대 명종 3년(1173)에 건축된 맞배지붕 건축물이다.대장전 전면에 새겨진 조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기둥 위에 연꽃, 붕어, 귀면이 있다. 외부 공포 위 창방 뺄목에 붙인 귀면과 물고기, 그리고 연꽃 봉우리가 새겨져 있다. 대장전을 관상하면서 이 세 가지를 놓치면 나중에 다시 보러 와야 한다. 이들은 모두 불을 끄는 부적의 의미가 있다. 1984년 초구일 새벽, 초파일의 뒷설거지를 하던 신도들이 연등을 수거하는 과정에서 촛불이 연등 더미에 넘어져 순식간에 5동의 건물을 태웠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1,000도가 넘은 화마에 대장전 건물은 온전하였다. 사람들은 대정전에 새겨진 그 세 가지 조각품의 주술적 방어력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를 더욱 신비롭게 여겼다.연꽃은 코끼리와 함께 불교의 상징으로, 처염상정(處鹽常淨)의 상징이다. 어떤 더러움에 처해도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귀면은 추녀 끝에 잇대어 댄 네모난 서까래에 있다. 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도깨비의 얼굴을 그린 장식품이다. 잡귀를 쫓는 의미일 것이다. 대장전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곰삭은 기둥이며 서까래와 특히 연꽃과 국화꽃으로 각기 다른 꽃살무늬를 정교하게 조각하여 만든 창호는 그윽한 아름다움이 풍긴다. 실내에 들어가서 보는 오래되어 퇴색된 단청은 고건축의 미를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대장전은 한때 국보 제243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어떤 연유에서이지 1963년도에 보물 제 145호로 변경 지정되었다.1969년부터 1972년 5월 까지는 관람료를 징수하기도 했다. 1972년도에는 문화재 관리국에서 건물 보수를 위해 지붕을 해체하던 중 중수상량문을 발견하였다.1767년(영조 43)에 작성한 것인데,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윤장대
대장전 안에는 윤장대(輪藏臺)가 있다. 국내 1,000여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용문사에만 있는 불교 공예품이다.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경전을 장대 안에 넣어두고 돌려가며 읽은 데서 윤장대라고 이름하였다.윤장대의 상부 가구(架構)는 다포식 공포로 그 솜씨가 섬세하고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마루 밑에 회전축의 기초를 놓고 윤장대를 올려놓았으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다.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에 1기씩 놓여있는데 화려한 팔각정자 형태이다. 아래부분은 팽이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난간을 두른 받침을 올린 후 8각의 집모양을 얹었다.
8각의 집모양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각 면마다 8개의 문을 달았다. 문은 좌우로 구분되어 4개의 문에는 꽃무늬 창살이 다른 4개의 문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정교하게 꾸며져있다.
문을 열면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좌측은 빗살무늬 장대이고 우측은 꽃무늬를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장대의 중수는 1625년도에 하였다고 내부 천장에 쓰여 있다.
윤장대로 장경을 돌리는 것에는 부처님의 법이 시방세계에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함께 우리나라의 지세를 고르게 하여 난리가 없도록 하고 비바람이 순조로워져 풍년이 들어 살기 좋은 세상이 되라는 뜻도 있다. 윤장대를 중심에 두고 원을 그리며 돌리면 소원이 풀린다고 한다. 한 번 돌리면 공부하는 이는 시험에 붙고 병고에 시달리는 자는 병을 낫는다. 박복한 자는 다복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보존이 잘 되어있고 8각형 모양의 특이한 구조수법이 돋보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로, 경전의 보관처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귀한 불교 공예품이다. 대장전을 창건할 당시 함께 제작된 것인지 조선 현종 11년(1670) 대장전을 새단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조각으로 장엄하게 장식한” 목불좌상 및 목각탱
대장전 안에는 삼존불과 목각탱불이 있다.숙종 10년(1684)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본존불은 넓적한 얼굴, 날카로운 눈, 작은 입 등에서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다.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려芟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臺座)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다. 가운데 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다. 목각탱의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본존상의 경우 머리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신체는 둥글며 옷은 두꺼워 신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각탱과 같은 기법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표현이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하단에 표현된 조성기(造成記)에 의하여 숙종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17세기 후반 조각양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임진왜란 때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 자운루
자운루는 2층 누각집으로 고려 의종 20년(1166)에 자엄대사가 세웠으며, 조선 명종 16년(1561) 고쳐 짓고, 광해군 13년(1621)에도 고쳐 지었다. 그 뒤, 1979년에 보수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ㆍ후반의 기법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법 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용문사에 잡역을 면제할 것을 인정하는 사패교지” 용문사 교지
세조 3년(1457)에 내린 교지로, 용문사에 잡역을 면제할 것을 인정하는 사패교지(공로가 있는 자에게 나라에서 부역을 면해주는 것을 입증하는 문서)이다. 이 교지의 내용은 ‘일찍이 감사와 수령에게 지시한 대로 경상도 용문사는 다시 심사하여 더욱 보호하고 잡역을 덜어 주라’는 것이다. 이 교지는 가로 44.8cm, 세로 66.5cm로 국왕의 수결(지금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 용문사의 지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잉태로부터 열반까지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그림” 팔상탱
팔상탱화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잉태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그림이다. 이 팔상탱화는 한 폭에 두 장면씩 네 폭으로 이루어져 있어 형식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제1폭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과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제2폭에는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제3폭에는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폭에는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청색을 주로 사용하여 주된 장면만을 강조하여 나타낸 비교적 간단한 구성을 하고 있다. 용문사의 팔상탱화는 조선 전기의 도상과 화풍의 흐름을 이은 것으로, 이후 제작된 팔상도 작품과는 차별화된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19회 문화재답사